-베를린 천사의 시를 끼얹은 AU. 천사 찰스와 인간 에릭이 다시 나란히 걷기까지의 이야기.
-포스타입 비공개를 하며 책으로 정리된 내용을 파트 2까지만 공개해놓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싸늘히 내리 식은 1944년. 그는 어린 소년을 위로하려 했다. 들릴 리는 없겠지만, 수심과 고통에 가득 찬 아이의 옆에 앉아 그를 날개로 감싸 안고 창백한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오늘의 일출은 7시 22분, 일몰은 4시 28분. 161년 전에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난 첫 번째 사람이 있었고, 잔세스칸스에서 한 청년이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진심을 담아 고백했단다. 세상은 아직 따뜻해, 얘야. 그는 조용히 울며 몸을 떠는 아이를 끌어안고 조심스레 토닥였다. 아이를 감싼 날개깃 하나하나, 아이와 닿은 모든 곳에 온몸으로 오열하는 소년이 느껴졌다. 그는 그 고통스럽고 고요한 떨림을 느끼며 소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뺨을 부비고는 어깨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의 손길은 아이에게 닿지 않았다.
Faraway, So Close
Ⅰ. Mr. Xavier 上
레이븐이 선언했다.
“우리는 ‘제대로 된 집’이 있어야 해.”
에릭은 조촐히 차려진 아침을 먹다 말고 결연히 일어선 레이븐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무심한 남자 같으니라고!’ 그녀는 에릭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쓰레기장 같은 곳에서 살 거야? 아이한테는 좀 더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고!”
아, 그렇지. 에릭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수용소와 전쟁 후의 난리 통을 전전한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다. 그 자신은 정상적인 성장의 길을 걷지 못했지만, 품 안에 들어온 뮤턴트들에게는 가능한 만큼의 행복을 누리게 해주고 싶다는 게 그의 작은 소망이었다. 또한, 그들이 머무는 좁고 더러운 할렘가가 상처받은 스콧에게 영 적당치 않은 곳이라는 것도 사실이었고.
그래서 그는,
“그럼 사야지.”
저택을 샀다.
“에릭이 미쳤나 봐.”
“그냥 미친 것도 아니고 제대로 미친 거 같은데.”
“근데 진짜 크긴 크다….”
그들은 멍청히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웨스트체스터의 숲에 숨겨진 낡은 저택은 오래되고 건물의 한쪽은 손질되지 않은 담쟁이덩굴에 휘감겨 제대로 된 형체도 보이지 않았지만,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레이븐은 ‘이사하자.’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저택을 공수해 그들 앞에 내어놓은 에릭의 저력에 혀를 내둘렀다. 션은 저택의 크기에 감탄하는 것과 동시에 낡은 문을 밀어젖히고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으엑, 먼지! 션이 기침하는 소리와 함께 그나마 멀쩡하던 유리창 몇 개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레이븐이 외쳤다. 멍청이! 안 그래도 치울 거 많단 말이야! 스콧을 안은 알렉스와 짐을 들고 있던 행크는 서로 마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른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으로 만들어야 할 텐데.
그들이 앞으로 살게 될 웨스트체스터의 저택은 오래전에 버려진 곳으로,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자자한 폐가였다. 혼자 외롭게 살던 첫 번째 주인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뒤로 주인이 몇 번 바뀌었지만 다들 죽거나, 불구가 될 정도로 다치거나, 미쳐서 나간 곳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이 주변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저택을 둘러싼 숲도 을씨년스럽다며 사람들이 피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에릭은 그 덕에 아주 싼 값으로 주변의 사유지까지 사들였고 숲은 물론 저택까지 온전히 그들의 것이 되었다. 레이븐은 유령이 나온다는 불길한 저택을 사들인 에릭의 무신경함에 혀를 찼지만, 저택을 직접 보자마자 그 아름다운 외관에 홀딱 빠졌다.
“유령이 나온다며.”
“오, 션. 유령이 나오면 너랑 함께 있으면 되겠다. 유령끼리는 뭔가 통하는 게 있을 거야.”
레이븐이 무심히 대답하며 마루를 닦았다. 해묵은 먼지가 닦이자 반지르르 윤이 나는 마룻바닥은 굉장히 고급스러웠고, 그녀는 이 저택이 관리만 안 되었을 뿐 아주 살기 좋을 것이라며 콧노래를 불렀다. 행크와 알렉스는 생활용품이라고 불리기엔 마뜩잖은 쓰레기들을 정원으로 옮겼고 션은 유리창을 닦았다. 따스하게 마른 햇볕이 창을 통해 쏟아졌다. 할렘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평화였다.
“스콧, 여긴 정말 살기 좋을 거야. 근처에는 호수도 있더라. 내년 여름에는 거기서 수영할 수도 있어.”
레이븐은 먼지만 대충 털어놓은 낡은 소파에 앉아 코코아를 홀짝홀짝 마시는 스콧에게 다정히 말했다. 스콧은 말없이 고개만 조금 끄덕였다.
스콧 서머즈는 알렉스의 동생이었다. 이 형제는 뮤턴트로서는 강력한 능력을 타고 났지만, 불행히도 조절하는 방법을 몰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량배들에게 위협을 당하다 건물 하나를 불태운 알렉스는 방화범으로 감옥에 갇혔다. 아무도 한 청년이 그런 식으로 건물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어린 스콧은 알렉스가 없는 기간 동안 받은 스트레스와 정서적 불안 때문에 조금 이른 시기에 각성하게 되었다. 어느 날 석양처럼 붉은빛이 작은 부엌을 날려버린 후, 두 형제의 집에서는 사람의 흔적이 사라지고 말았다.
붙잡혀 있던 것은 단 일주일이었지만 결론만을 말하자면 끔찍함의 일색이었다. 열 살도 채 되지 못한 어린아이는 연구소에서 각종 실험을 빙자한 고문을 당했고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능력에 완전히 겁에 질려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연구원과 과학자들은 스콧을 비롯한 다른 뮤턴트들을 실험쥐 다루듯 다루며 그 어떤 인간적인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각양각색의 뮤턴트들은 피부와 장기를 적출당하고, 팔다리가 끊어지거나 자신의 능력으로 다른 뮤턴트 들을 공격하여 능력에 대한 연구를 받는 식으로 삶을 연명했다.
소년은 눈을 떠서 능력을 쓸 것을 강요당했지만 눈이 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부엌이 완전히 녹아버렸던 것을 기억했기에, 그 어떤 폭력과 협박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어떤 소년이나, 소녀나, 어른이 그곳에 서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어린 스콧에게 그것은 이겨내기 어려운 공포였다. 두려움에 가득 찬 채로 어둠 속에서 작게 흐느끼던 스콧을 위로한 것은 션이었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눈을 뜨면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하는 션을 녹여 버릴까 봐 차마 보지는 못했지만, 그 목소리만은 똑똑히 기억했다. 션은 높은 파동을 내는 목소리로 유리를 깨부술 수도 있고, 거의 초음파에 가까운 음역의 소리를 내는 능력을 지닌, 그 능력과는 별개로 긍정적이고 소탈한 성격을 가진 청년이었다. 스콧은 연구원들이 다 나가고 어두운 밤이 되면 션과 조근조근 대화했다. 부모님 대신 자신을 키운 알렉스의 이야기, 혼자가 된 이야기, 능력을 자각했을 때의 이야기, 그리고 이곳에 잡혀 온 이야기. 션은 눈을 꼭 감고 있는 스콧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네 형은 꼭 너를 구하러 올 거야. 조금만 더 힘내 스콧.”
그다음은 행크였다. CIA의 연구원으로 이곳에 방문한 행크는 연구소의 실태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실험에 쓰이는 기계를 손봐달라고 해서 오긴 했는데 이런 지옥이 펼쳐져 있었을지는 몰랐어. 행크는 심지어 이곳에서 무슨 실험이 벌어지는지도 몰랐었다. 이 연구소에 대한 것은 다른 부서에서도 제대로 모른다 했다. 다른 이들을 부른다면 복잡한 문제가 생기겠지만, 순진하고 성실한 행크를 무시한 연구원들이 가벼운 일인 양 부른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 겁쟁이가 어딜가서 말할 수 있겠어? 그들 중 하나가 이죽이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실험, 그리고 고문. 그들은 돌연변이들을 원숭이보다도 못한 존재처럼 취급했다. 새파랗게 질린 행크는 그들이 요구한 기계를 빠른 시일 내로 개조해주겠노라 약속하고는 매일매일 연구소에 들렀다. 또래인 션과 가까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션이 특별히 챙기는 스콧과도 말을 트게 되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조금만 더 참으면 될 거야.”
행크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들에게 속삭였고 스콧이 붙잡혀 온 지 일주일, 자유가 찾아왔다. 반 정도는 죽음에 뒤범벅된 쓰디쓴 자유였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행크는 유난히 큰 발로 빨리 달리거나 벽에 매달릴 수도 있었다.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던 청년은 같은 돌연변이들이 실험당하고 고문당하며 죽어가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연구소를 알게 된 날부터 당장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고 그의 레이더망에 걸려든 것은 매그니토, 에릭 랜셔의 브라더후드였다. 어렵사리 그들과 연결된 행크는 그 무리 안에 감옥에 있다던 알렉스 또한 있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했다. 에릭은 차분하지만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습격계획을 짰고 행크는 내부에서 성심성의껏 그를 도왔다.
일주일 째 되는 날. 연구소는 흔적만 남긴 채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실험을 못 이기고 죽은 뮤턴트들을 제외한 돌연변이들은 브라더 후드에 합류하거나 정부를 피해 숨어들었다. 션과 행크는 에릭과 함께하겠다는 의지를 굳혔고 에릭과 함께 연구소로 들이닥친 알렉스는 일주일 동안 바싹 마른 스콧을 품에 안고 물었다.
“형은 이 사람들과 함께 싸우고 싶어. 다시는 널 그런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 넌 어떻게 생각하니 스콧?”
스콧은 눈을 꾹 감은 채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의 형과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 그리고 에릭. 에릭에 대해 말하자면, 스콧은 그다지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레이븐은 냉철하고 도도한 엠마와는 달리 수다스럽고 소녀다운 구석이 있는 아가씨인지라 알렉스가 안고 온 스콧을 보자마자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챙겨주었다. 아마도 어쩌면, 바짝 마르고 주눅이 든 꼬마를 보며 그녀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콧이 그녀의 손을 잡게 된 이후로, 교육이나 지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 혹은 건강 상태까지 레이븐의 손이 닿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레이븐은 스콧을 친동생처럼 대했고, 행크가 만들어준 선글라스를 쓰고 레이븐을 처음 봤을 때의 스콧은 레이븐이 아주 아름다운 황금빛 눈을 가졌다는 것에 감탄했다. 다만 원래의 선명한 색으로 레이븐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조금 아쉬워했다. 알렉스의 표현으로는 그녀의 섬세하고도 단단한 피부는 선명한 파란색이라 했다. 그런 다정한(스콧 한정으로) 레이븐이 온갖 잔소리를 쏟아내는 상대가 에릭이었다. 물론 에릭은 레이븐의 타박만을 받아들였다.
스콧은 막 구조되었을 당시 에릭의 서늘하고도 매력적인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고 행크가 건네준 특수 선글라스를 꼈을 때 어수선한 할렘가의 창문으로 바쁘게 나가는 에릭의 얼굴을 스치듯 볼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그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에릭은 단단한 바위처럼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지만 가끔 레이븐은 에릭에 대해서 겉은 단단해 보이지만 속은 젤리처럼 물렁물렁한 남자라고 평했다. 가차 없는 평가였다.
“이 저택의 유령 이름을 알려줄까?”
창문을 다 닦아낸 션이 발랄하게 외쳤다. 저 멀리서 행크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라고 묻자 어깨를 으쓱한 션은 멀리 보이는 정문을 가리켰다.
“저기 현판에 자비에라고 쓰여 있어. 내가 알기로는 여기 첫 번째 주인 성이 자비에였대. 가족도 없이 혼자 살던 남자인데 서재에서 책장이 쏟아져 깔려 죽었다나? 불쌍하게도 하반신이 완전히 깔려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대. 물론 혼자 사니까 그 사람이 죽은 걸 발견하는 것도 늦었고. 주인이 그렇게 죽었지만, 저택이 하도 아름다워서 그 뒤로도 주인이 몇 번 바뀌었는데….”
션이 소파에 앉아 코코아 잔을 꽉 움켜쥔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스콧을 보며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밤마다 서재에서 그 남자가 나와서 저택을 떠돌아다닌다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내 다리 내놔, 내 다리… 내 다리!!!”
“으아악!”
“아 뜨, 뜨거워!”
진부하기 짝이 없는 ‘내 다리 내놔.’를 연기하며 갑작스레 스콧에게 뛰어들자 질겁한 스콧이 코코아 잔을 내던져버리고 그게 션의 얼굴에 정통으로 쏟아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거의 식어 따스한 정도였지만 션은 달콤하고 끈적한 코코아가 얼굴에 닿자마자 뜨겁다며 소파 주위를 뛰어다녔고 스콧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에 알렉스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션, 너 내 동생 쓸데없이 놀리면 죽는다!”
“장난이야, 장난! 레이븐, 거기 수건 좀 주라.”
“바보! 알아서 처리해!”
내 편은 하나두 없어, 라며 울상이 된 션이 행크가 던져준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겁에 질린 스콧에게 눈을 찡긋했다.
“아무튼 그 유령 이름은 Mr. Xavier야. 만나게 되면 소금을 뿌리고 ‘다리는 여기 없으니까 꺼져!’라고 우렁차게 외쳐주면 돼.”
스콧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끄덕였다. 유령 따윈 질색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스했던 저택에 한기가 도는 것 같았다. 알렉스와 레이븐은 스콧의 질린 얼굴을 보고는 차례로 손걸레와 수건을 내던졌다. 다 즐기자고 하는 이야기란 말야! 물론 그 대가는 가차 없는 청소였다. 션은 나머지 세 사람이 1층을 정리하는 동안 혼자서 오후 내내 2층을 치워야 했다.
외로이 있어야 할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찾아왔다. 저택을 대충 정리하고 하룻밤 자고 일어났을 때 에릭에게서 연락이 왔다. 인력이 부족하니 되도록 빨리 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알렉스는 빈 저택에 스콧을 혼자 두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할렘가보다는 안전할 거라는 행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 주변에는 그들을 위협할 어떠한 인간도 없었다. 지극히도 평화로운 초겨울의 풍경뿐이었다. 스콧은 용감하게 그들을 보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할렘가에 어른들 없이 혼자 있을 때도 무서웠지만 그래도 그때에는 바깥으로 많은 사람이 지나다녔다. 아무 짓도 못하는 유령보다는 언제라도 끔찍한 짓을 할 수 있는 인간들이 더 무섭지만, 고작 아홉 살이 된 어린 소년에게는 거대하고 텅 빈 저택에 온종일 혼자 남아있는 것이 더 외롭고 쓸쓸한 법이다. 레이븐은 정문까지 따라와서 배웅하는 스콧을 꼭 껴안아주었다. 알렉스도 스콧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뺨을 장난스럽게 쭉 잡아 늘였다 떼었다. 션은 금방 올게! 라며 발랄하게 말했고 행크는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도록 장난감 기계를 손에 들려주었다.
이윽고 스콧은 혼자 남았다.
‘미스터 자비에’에 대해 겁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스콧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냈다. 행크가 스캔해 본 바로는 저택 안에는 어떠한 비이상적인 에너지도 없이 깨끗했다. 예전 심심풀이로 폐가에서 측정했던 암울한 에너지는 한 톨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어째서 그런 소문들이 돌았는지 모를 완벽한 보금자리였다. 행크는 스콧에게 안심하라며 웃었고 션은 농담이었다며 웃었지만 그래도 그 유령이 미스터 자비에라고 불렸다는 것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이루어진 저택의 불행한 재난은 모두 미스터 자비에의 탓이었다더라, 라는 영 친절치 못한 부연설명에 스콧은 작게 비명을 질렀고 알렉스는 깨끗한 커버를 씌운 쿠션을 션의 머리에 내던졌다. 션은 쿠션에 맞으며 깔깔 웃어댔다. 곧이어, 션은 어리둥절해진 스콧을 안아 들고는 알렉스를 피해 겨울 해 질 녘의 정원에서 한바탕 뜀박질을 해댔다. 스콧은 그 시간이 못내 좋았다.
아무튼, 스콧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현재를 즐기기로 했다. 어린아이가 어른들이 없는 크고 텅 빈 집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탐험이다. 물론 만일을 대비해 소금 한 주머니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스콧의 뒷주머니에 안전하게 자리 잡았다.
저택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복도 곳곳에 놓여있는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촛대들과 붉고 색 바랜 카펫이 깔린 층계참, 2층의 커다란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물이 마른 분수와 회색으로 바뀌는 숲. 정원에는 석조 벤치가 있었고 계절에 말라버린 야생화 덤불에서 새들이 작게 울었다.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진 목조 기둥들은 잘 깎인 채로 세월을 보내 짙은 향을 풍기고 우아한 벽지와 아치형 난간이 그것을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뽀얗게 쌓인 먼지마저도 향기롭게 느껴졌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저택은 숲의 완벽한 고요 속에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겨울이 되어 눈이 오면, 숲은 눈으로 가득 쌓이고 그들은 아마 크리스마스를 아늑한 저택 안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바깥의 인간들에 대한 걱정을 한쪽으로 치워 놓은 채. 스콧은 어느새 두려움을 잊어버리고 즐거움에 차 저택 곳곳을 돌아다녔다. 수십 개의 방, 침실, 거실, 부엌, 식료품 창고를 지나쳐서 세월에 삭았지만 여전히 튼튼한 계단을 타고 올라갔을 때, 스콧은 아까 창문 밖을 보러 올라왔을 때는 발견하지 못한 방을 발견했다. 왜 몰랐었는지 모를 방이었다. 초겨울의 햇살이 눈부시게 새어 나오는 열린 문틈으로 먼지가 부유했다. 스콧이 그동안 지나쳐온 모든 방은 문이 닫혀 있었는데 이 방만은 예외였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스콧은 조심히 발을 움직였다. 마치 다른 세계로 가는 입구로 가는 것 마냥 두근거렸다.
문과 단 한 발자국 정도의 거리가 남았을 때 책 냄새가 훅하니 풍겼다. 아이는 함빡 미소를 지었다. 할렘가에서 머물 때나, 예전 연구소에 붙잡혀 가기 전엔 여유가 되지 않아 책들을 많이 보지 못했는데, 서재가 있다니 굉장한 행운이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몇 번이나 바뀐 저택의 주인들은 그들이 수집해온 수많은 책을 그대로 두고 이 저택을 떠난 것이 분명했다. 막 발걸음을 떼어 열린 문을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어린 소년은 가엽게도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스콧은, 그 날 푸른 눈의 유령을 보았다.
밤늦게 돌아온 일행을 맞은 스콧은 희게 질려 있었다. 레이븐은 혹 몸이 안 좋은가 싶어 스콧의 이마를 짚었지만, 스콧은 고개를 저었다. 다만 스콧의 시선은 이제야 제대로 마주친 에릭의 뒤쪽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정부와의 마찰 탓에 지쳐있던 그들은 미처 소년의 시선에 신경 쓰지 못하고 그나마 깨끗한 방을 아무렇게나 골라잡아 들어갔다. 스콧은 에릭이 구석진 방으로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그를 지켜보았다.
오후의 햇살 속에 섞인 책 향기를 만끽할 새도 없었다. 서재 안을 들여다본 스콧은 그대로 굳었고 얼른 복도 쪽으로 몸을 붙이고 심호흡을 했다. 낯선 남자였다. 저택으로 오는 모든 길이 저택 안에서 훤히 보이는 마당에 낯선 사람이 올 구석은 없다. 게다가 내내 저택을 쏘다닌 스콧과 마주치지도 않고 2층으로 올라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콧은 하얗게 질려 숨을 내쉬었다. 서재, 남자, 저택. 단어들에서 유추할 수 있는 적당한 이름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미스터 자비에!
하지만 남자의 하반신은 멀쩡했다. 숨을 가다듬자 두려움 대신 호기심이 치고 올라왔다. 게다가 아직 저택은 한낮의 햇볕에 달궈져 따스했다. 스콧은 용기를 내어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반코트를 입은 남자는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기묘할 정도로 희었고 눈은 언젠가 책에서 본 그리스의 바다처럼 푸른색이었다. 짙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사슴처럼 온순한 얼굴의 반을 덮고 있었다. 남자는 탁자에 펼쳐진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유령이라기보다는 인간 같았다. 그의 존재는 햇볕 아래서 뚜렷이 빛났고 스콧은 그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남자에겐 그림자가 없었다. 진짜 유령이잖아!
차라리 인간 침입자인게 스콧의 정서에 더욱 나았으리라. 그리고, 그의 시선이 책이 빽빽이 꽂힌 책장을 휘돌아 마침내 스콧에게 향했을 때 스콧은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남자는 아주 희미하게 웃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스콧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소년은 거의 울 뻔했다. 코끝이 공포로 시큰했다.
밤늦게 일행이 돌아왔을 때, 스콧은 기쁨의 환성을 지를 뻔했지만 눌러 참았다. 피곤한 어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낮의 사건 덕에 스콧은 해가 질수록 무서워졌고, 벽난로를 활활 태우고 1층의 모든 불을 켜 놓았다. 전기를 많이 사용했다고 혼나도 상관없었다. 맙소사, 유령이라니. 미스터 자비에가 틀림없었다! 오늘 낮의 행동으로는 위험하진 않았지만, 스콧은 방심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바뀐 저택의 주인들은 그 유령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션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어. 어린 소년은 뒷주머니에 있던 소금 주머니를 빼내어 구명줄마냥 꼭 쥐고 있었고 하루가 다 가도록 그 유령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어른들이 돌아오기 전에는.
“다녀왔어, 스콧!”
레이븐이 피곤한 표정으로 발랄하게 인사했고 스콧이 그녀를 본 순간 그는 그 자리에 굳은 채로 멈춰 섰다. 낯익은 얼굴이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오, 맙소사. 벽난로로 덥혀진 집 안이 차게 식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스터 자비에.
스콧이 속으로 희미하게 속삭였다. 소년이 희게 질려 유령을 탐색할 때 유령이 언뜻 그를 쳐다본 듯도 했다. 하지만 스콧은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아무도 저게 안 보이는 거야? 단 한 명도? 레이븐도, 행크도, 알렉스도, 션도, 엠마도, 다른 모든 어른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심지어 그 유령을 바로 뒤에 달고 있는 에릭까지도! 피곤에 지친 얼굴 위로 벽난로의 불빛에 비쳐 짙게 음영이 진 근사한 남자를 제대로 관찰할 새도 없었다. 언젠가 에릭과 마주하면 그에게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건넬 생각이었는데 다 틀려버렸다. 스콧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보는 레이븐과 알렉스에게도, 은인과도 같은 에릭에게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다만 에릭 뒤의 그 유령이 에릭이나 다른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할까 걱정이 되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스터 자비에는 낮에 서재에서 봤던 것처럼 유순하고 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에릭은 곧 방으로 들어가 버렸기에 유령을 계속 주시할 수가 없었다.
“뭐해, 스콧. 안 잘 거야?”
알렉스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을 때 스콧은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에게 굿나잇 인사를 하고 작지만 아담하고 예쁜 방(레이븐이 이 방은 절대 스콧 것이라며 못 박아 놨던 그 방)으로 들어가며 스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첫째 날.
스콧은 에릭을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에릭은 여전히 등 뒤에 유령을 붙이고 있었다. 스콧은 아자젤이 요리한 아침(붉은 남자는 요리를 아주 잘했다. 레이븐이나 엠마, 엔젤은 가끔 그에게 쿠키나 케이크를 부탁했는데 그것마저도 아주 맛있었다)을 먹으며 흘끗흘끗 미스터 자비에를 살폈다. 미스터 자비에는 어제와 똑같았고 여전히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스콧은 어젯밤 어떻게 하면 미스터 자비에를 쫓아낼 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답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유령이 대체 뭘 무서워하지? 얄팍한 지식으로는 소금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의 눈앞에 서 있는 미스터 자비에는 식탁 위의 소금병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소금병을 집어 든 레이븐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가 소금을 치는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아이의 시선이었다. 또는 이제 막 발걸음을 떼는 아이를 보는 듯한 시선이기도 했다.
“당분간 푹 쉴 거야!”
레이븐이 전투적으로 포크질을 하며 선언하듯 외쳤다. 미스터 자비에는 그녀의 모습에 작게 미소 지었다. 스콧은 순간 긴장했으나 그 웃음이 공포영화에서 보던 소름 끼치는 웃음이 아닌 것에 조금 안도했다. 미스터 자비에의 미소는 따스하고 상냥했다. 봄날 초원에서 뛰노는 새끼양을 보는 어미양 같은 미소였다. 바다같이 푸른 눈은 애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스콧은 그 눈을 보았을 때 경계심이 모조리 풀려버릴 뻔한 것을 애써 수습했다.
스콧 서머즈, 정신 차려! 속아 넘어가면 안 돼. 내가 보고 있지 않으면 다들 이 저택의 전주인들 꼴이 날거야!
어린 스콧은 소문 속의 죽은 저택 주인들을 생각하며 몸을 한번 부르르 떨었다. 어른들이 그를 지옥에서 꺼내오고 보살피고 보호해온 것처럼, 이번에는 그가 어른들을 지킬 것이다. 소년은 지난밤 잠 못 이루고 한 그 결심을 다시 다지고 있었다. 유령을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짓을 벌일락 싶으면 소금을 뿌릴 작정이었다. 그게 소용이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간.
전날 시카고의 비밀 연구소를 파괴하고 온 그들은 피곤한지 아침을 먹고 저택 곳곳으로 흩어졌다. 행크는 저택에 연구실을 꾸미겠다고 부산스럽게 움직였고 션과 알렉스를 억지로 끌고 가 시카고 연구소에서 가져온 실험기구들을 옮기게 했다. 레이븐은 방에 들어가 부족한 잠을 청했고 엠마와 엔젤은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며 가장 아름답고 볕이 잘 드는 방을 찾았다. 각자의 방을 고른 뒤에는 아자젤과 립타이트에게 부탁해 커튼을 갈고 손이 닿지 않는 창틀과 석조장식을 닦고 고장 난 가구를 버렸다. 그녀들의 미적 감각에 이 낡고 아름다운 저택은 아주 꼭 맞는듯 했다. 화사한 꽃 벽지가 발려있고 흰 창틀 위로 눈부시게 햇살이 떨어져 내리는 방 안에서는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유령은 그녀들을 지켜보다가 벽 뒤에 숨어 자신을 지켜보는 스콧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지긋이 스콧을 쳐다보았다. 스콧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받아쳤지만, 그뿐이었다. 그 날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둘째 날.
스콧은 미스터 자비에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그 유령은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저택의 물건을 들어 올린다든가 계단에서 누군가를 밀친다든가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온갖 무섭고 절망적인 상상을 하던 스콧은(뮤턴트는 뮤턴트일 뿐 퇴마사가 아니다. 게다가 스콧은 이런 초자연적인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전혀!) 평화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어느새 경계가 아닌 관찰로 자신의 임무를 바꿨다. 미스터 자비에는 그냥 그들의 곁에 있었다. 조용히 공기 중을 부유하는 듯한 발걸음은 주로 에릭을 따라다녔지만(스콧은 당최 미스터 자비에가 왜 에릭 만을 집중적으로 따라다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끔 그 유령은 서재나 부엌, 정원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있었고 그게 아니면 서재에 있었다. 낮과 밤은 그에게 중요치 않은 듯했다. 태양이 하늘 중앙에 뜬 정오에도 그 유령은 여전히 보였다. 하지만 그림자는 없었다. 스콧은 그것으로 그가 유령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하지만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미스터 자비에는 자애로운 보호자, 혹은 주의 깊은 경청자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에릭이 서재의 책상 앞에 앉아 정부에서 훔쳐온 서류들을 읽고 각종 자료를 정리하며 다음 계획을 짤 때, 그는 에릭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에릭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스콧은 서재 문틈으로 그것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미스터 자비에는 허리를 굽혀 에릭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와 함께 서류들을 보았다. 에릭이 서류를 훑다 펜을 내던지며 표정을 찡그려졌을 때, 남자는 에릭에게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너무 작아 잘 들리진 않았지만 아마도 그건, 위로하거나 격려하는 속삭임이었던 거 같다. 에릭은 찌푸려진 눈썹을 펴고 펜을 다시 잡았다. 그는 만족한 듯 웃더니 에릭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행크가 새로 꾸민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고 각종 화약 약품을 끓일 때, 유령은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가끔 행크가 기뻐하며 무언가를 종이에 휘갈기면 그도 같이 웃었다. 레이븐과 엠마와 엔젤이 거실에 모여 아자젤이 구워낸 쿠키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눌 때, 그도 거기에 같이 있었다. 이번 시즌에 유행하는 패션이나 헤어, 구두, 또는 각종 달콤한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들. 유령은 빈 소파에 앉아 그녀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는 가끔 그들이 너무나도 맛있게 먹는 쿠키에 손을 대보곤 했지만 여지없이 그의 손에 닿지 않았다. 션이 방에 틀어박혀 음반을 들으며 노래를 흥얼거릴 때, 그는 션에게 등에 기대 그 소리를 들었다. 션의 허밍은 등을 타고 그에게 흘러갔다. 알렉스가 정원을 한 바퀴 뛸 때, 그는 알렉스와 함께 있었다. 겨울의 햇볕과 바람을 그대로 받으며 멀리까지 뛰어갔다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쭉 지켜보았다. 립타이트가 내년 봄 정원에 심을 꽃씨들을 고민하며 커다란 식물사전을 뒤적일 때, 그도 있었다. 아자젤이 부엌에서 저녁 메뉴를 고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자젤이 마침내 메뉴를 정하고 물을 끓이고 재료를 다듬을 때까지 그는 거기 있었다. 그는, 모두와 함께 있었다. 아주 평화롭게. 다정하게. 상냥하게. 주의 깊게.
그래서 스콧은 마침내 그 유령이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때 겁내지 않을 수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스콧은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재에서 찾아낸 책을 읽었다. 등 뒤의 그가 같이 읽을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레이븐, 스콧이 요즘 뭘 하고 다니는 지 알아?”
알렉스가 머리에 묻은 물을 수건으로 털어내며 물었을 때 레이븐은 고개를 저었다. 계속 저택 여기저기를 쏘다니던 스콧은 그들이 일을 끝내고 돌아온 뒤로 그들의 하루생활을 아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가올 생각은 하지 않고 벽을 하나 두고 마치 위장수사를 하는 것처럼 몰래(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사실 전혀 비밀스럽지 않았다)빤히 지켜보기만 했다.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작은 소년이 다람쥐처럼 이리저리 숨어 다니는 것이 귀여워 그대로 두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고되고 거친 삶 속에서 살아가는 어린 소년을 사랑했다. 아이의 아이다움과, 순수함과, 티 없음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레이븐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름대로 놀고 있나보지.”
셋째 날.
스콧은 더는 미스터 자비에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 유령은 자신의 상상 속의 유령들처럼 소름끼치거나, 난폭하거나, 피 칠갑을 했거나, 슬픔이나 분노에 차 있지 않았다. 넓은 창틀에 걸터앉아 방에 들어서는 스콧을 지켜보던 미스터 자비에는 스콧이 그를 똑바로 바라봤을 때 고요하게 시선을 마주쳤다.
“이름이 뭐예요?”
남자는 웃었다.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찰스.
그리고 그가 이름을 속삭였을 때, 스콧은 그 이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넷째 날.
뉴올리언스의 속보에 그들은 급박하게 움직였다. 어제 들여놓은 흑백 텔레비전에서는 자기 힘을 컨트롤하지 못한 뮤턴트에 의한 폭발을 중계하고 있었다. 경찰이 투입되고 에릭은 심각한 얼굴로 아자젤과 립타이트, 엠마, 알렉스와 함께 뉴올리언스로 떠났다. 찰스(스콧은 그의 이름을 부르기로 결심했다)도 에릭과 함께 떠났다.
그 날, 남은 사람들은 텔레비전 앞에서 밤을 지새웠다. 스콧은 흑백 텔레비전 안에서조차 빛나는 엠마의 희고 아름다운 겉옷을 언뜻 볼 수 있었다. 이름 모를 뮤턴트는 여전히 폭주하고 있었고 그의 힘은 뉴올리언스의 거리를 초토화 시켰다. 정부에서는 그 사이 군대를 투입했다. 군인들은 뮤턴트를 향해 총을 쏘고 소형 폭탄을 던졌다. 이미 손을 쓸 수 없이 파괴된 곳이 많아 내려진 조치인 것 같았다. 리포터의 목소리가 폭발음에 묻혔다. 거리는 지옥같이 불타올랐고 비명이 들려왔다. 행크가 소파에 앉아 주먹을 꼭 쥔 스콧의 눈을 가렸다.
“들어가서 자렴. 늦었잖니.”
그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고 스콧은 그들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스콧은 행크와 션, 레이븐과 엔젤에게 차례로 키스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깊은 구덩이 같은 어둠이 그를 반겼다. 스콧은 떨어지듯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잠결에 조금 흐느꼈던 것도 같다.
다섯째 날.
소년은 하루 종일 앓았다. 뜨거운 열이 스콧의 온몸을 뒤덮었다. 마치 불에 타들어가는 것 같아서 아픔을 참지 못하고 조금 울었지만 눈가의 눈물은 열에 말라붙었다. 레이븐은 아침식사시간에 늦는 스콧을 부르러 방에 들어갔다가 아이가 앓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얼른 찬물에 적신 수건을 이마에 올려주었다.
“어린 아이들은 가끔 이렇게 아프기도 해. 괜찮아.”
레이븐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속삭였다. 아자젤이 챙겨온 해열제를 간신히 삼켰을 때, 스콧은 멍한 정신으로 떠났던 이들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분위기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알렉스가 지친 얼굴로 들어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고 마른 입술로 물을 흘려 넣어주었다.
“아프지 마.”
그의 형이 슬프게 중얼거린 것에 스콧은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으나 바싹 마른 입안을 적시는 물을 간신히 삼킬 정도의 힘 밖에 남아있지 않아 차마 그러지 못했다. 알렉스는 한참 동안 스콧의 머리맡을 지키다 나갔다. 알렉스의 뒤를 이어 몇 사람이 와서 스콧을 살펴보고 갔지만 스콧은 정확히 누가 다녀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소년은 깊은 슬픔과 열에 들떠 흐느꼈다. 예전 연구소에서 실험쥐처럼 대해지던 때가 떠올랐다. 아니, 그곳은 뮤턴트들이 실험쥐보다도 훨씬 비천하고 하잘것없게 다뤄지던 곳이었다. 피 냄새와 약품냄새가 진동하고, 비명소리와 살을 지지고 뼈를 꺾고 장기를 도려내는 소리가 들리던 곳. 스콧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운 숨이 목 근처까지 차올라 폐가 산소를 갈구했다. 숨이 막히는 고통과 온몸이 펄펄 끓는 와중에 스콧은 자신의 삶에서 제일 끔찍했던 때를 생각했다. 능력을 조절하지 못해 눈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던 그 때, 뇌까지 달궈지는 것 같았던 그 때, 공포와 외로움에 온몸이 차갑게 식어 일말의 따스함도 찾을 수 없었던 그 때. 하지만 그들은 결국 살아남았지 않은가. 하지만.
하지만 뉴올리언스에서 사그라졌을 그 사람은.
스콧은 열이 올라 눈물이 나오지 않음에도 흐느꼈다. 온몸이 폭발하는 화염 속에서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팠다. 뜨거웠다. 몸을 내려다보면 온통 화상에 뒤덮여 있을 것 같았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안다. 하지만 정말로 불에 타들어갔을 어떤 이의 몸은 지금쯤 차갑게 식어있을 터다.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아무런 도움도 되어주지 못해서. 스콧이 한동안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입술을 깨물며 삼켰을 때, 서늘한 손이 그의 뜨겁게 달아오른 작은 손에 얹어졌다.
괜찮을 거야, 얘야.
흐린 시선 위로 언뜻 희고 아름다운 것이 보였다.
괜찮을 거란다.
스콧은 귀에 속삭여 오는 그 상냥한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손 위에 얹힌 서늘한 손과 이마 위를 스치는 희고 부드러운 것도 느껴졌다. 목소리는 다시 한 번 속삭였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렴. 그러면 모든게 괜찮아질 거야. 스콧은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더운 숨을 내쉬었다.
다 괜찮을 거야.
그 목소리가 한 번 더 속삭였을 때 스콧은 그제야 잠에 빠져들었다. 꿈도 없는 잠이었다.
목이 말라 잠에서 깨었을 때 그의 형은 침대 맡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알렉스의 손에는 지난 밤 사이 마른 수건이 들려 있고 옆의 탁자에는 미지근해진 대야가 보였다. 스콧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벗어났다. 하루 동안 그를 괴롭힌 열은 대야의 물처럼 미지근해져 있었고, 발 한쪽을 잠에 걸친 소년은 자신을 간호하느라 고생했을 형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새벽녘의 저택은 싸늘하고 고요했다. 카펫이 깔린 바닥을 밟으며 부엌으로 가던 스콧은 꺾인 복도 안 쪽에 있는 에릭의 구석진 방에서 불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잠깐 동안 고민한 스콧은 조심스럽게 에릭의 방 근처로 가 열린 문 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희미한 램프의 불 옆으로 슬픔에 젖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에릭의 차갑고 단정한 얼굴의 반쪽은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고 그의 앞에는 마티니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새벽 성에가 유리에 낄 때까지 죄책감에 잠 못 이루는 남자가 거기 있었다. 그리고 스콧은 작게 숨을 삼켰다.
희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천사가, 그곳에 있었다. 스콧은 찰스의 등 뒤에서 솟아난 날개가 에릭을 감싸 안은 것을 보았다. 램
프 빛에 반사된 깃털 하나하나가 상냥함과 위로를 담고 에릭의 몸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찰스는 푸른 눈으로 에릭을 보며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다. 슬픔에 반쯤 적셔져 있었으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괜찮아. 나의 꼬마 에릭,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걱정하지 말렴. 모두 다 괜찮을 거야.
스콧은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나왔다. 저택은 여전히 나지막한 고요 속에 있었다. 그러나 어린 소년에게 새벽녘의 저택은 더는 싸늘하지 않았다. 도리어 따뜻한 것이 소년의 가슴을 채웠다. 충만하게 가슴 가득 차오르는 그것을, 스콧은 차마 표현해 낼 수 없었다.
“스콧, 어디 갔었어?”
물 잔을 든 알렉스가 스콧에게 작게 물었다. 잠에서 덜 깨었으나 침대에 스콧이 없어 나온 김에 부엌에 다녀온 듯했다. 스콧은 알렉스에게 잔을 받아 몇 모금 마시고는 넘겨주었다. 알렉스는 가볍게 스콧을 안아들었다. 스콧은 알렉스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어깨를 끌어안았다.
“형, 우리 곁엔 천사가 있어.”
잠에 반쯤 취한 알렉스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는 스콧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방으로 향했다.
“그럼, 네가 우리의 천사잖아.”
스콧은 알렉스에게 그게 아니라고, 정말 천사가 있다고 말하려 했으나 왠지 모를 안도감과 쏟아져 오는 잠 때문에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들과 함께 기뻐하는, 그들을 위로하는,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는 천사가 그들 곁에 내려와 있었다. 에릭의 곁에 있었다.
“잘 자 스콧.”
알렉스가 스콧의 이마에 뺨을 부비고는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스콧은 몽롱한 상태에서 알렉스에게 잘 자라며 웅얼거리고는 잠으로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어떤 뜨거움도 아픔도 슬픔도 없는 잠이었다. 무서울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세상이 그들을 증오해도, 천사가 그들의 곁에 있었다.
'X-men > Faraway So Clos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릭찰스] Faraway, So Close Ⅱ. 아이가 아이였을 때 (0) | 2016.11.2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