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천사의 시를 끼얹은 AU. 천사 찰스와 인간 에릭이 다시 나란히 걷기까지의 이야기.
-포스타입 비공개를 하며 책으로 정리된 내용을 파트 2까지만 공개해놓습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도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Als das Kind Kind war
ging es mit hängenden Armen
wollte der Bach sei ein Fluß
der Fluß sei ein Strom
un diese Pfütze das Meer
Als das Kind Kind War
wußte es nicht, daß es Kind war
alles war ihm beseelt
und alle seelen waren eins
- 베를린 천사의 시 中 -
Faraway, So Close Ⅱ. 아이가 아이였을 때
찰스는 천사치고는 조금 특이했다.
아니, 정정하겠다. 그는 아주 특이했다.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을 관찰하는 것이 천사의 임무이긴 했지만, 찰스는 그것에 더해 그들과 같은 경험을 하길 원했다. 그는 한때 소크라테스의 곁에 머물며, 많은 제자에게 둘러싸여 열정적으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찰스는 그를 보며 자신이 저 중앙에 서서 강연할 수 있으면 어떤 느낌일까, 하고 생각했다. 호메로스가 그의 장대한 서사시를 쓸 때, 찰스는 아침 해가 해 질 녘 노을이 되어 그 남자의 늙은 얼굴을 부드럽게 적실 때까지 곁에 머물렀다. 덜 마른 잉크가 주름진 손가락을 적신 것을 보며 그 위에 손을 얹어 보기도 했다. 카롤루스 대제가 말을 타고 행진할 때 그 말의 뒷자리에 걸터앉아 있기도 했고, 살라딘이 술탄이 되었을 때는 옆에 서 있었다. 위대한 왕이라 해도 그들의 모든 시간조차 위대한 것은 아니기에 찰스는 남들이 모르는 모습들을 보며 즐거워했다. 가끔 그러한 인간들에게서도 아이 같은 순진함을 찾을 수 있다. 찰스는 르네상스에 찬사를 보내고 모차르트와 반 고흐를 사랑했다. 인간들이 오랜 세월 갖게 된 미의식과 그것을 표현하는 감성은 놀라울 정도였다. 라이트 형제가 어설픈 첫 비행을 할 때 날개 쪽에 앉아있기도 했다. 인간이 천사처럼 날 수 있다니(물론 언제나 처음은 형편없기 마련이다), 재미있는 변화다. 사진기를 발명했을 때는 그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기도 했지만, 물론 찍히진 않았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 도착’은 그가 꽤 애착을 둔 작품이었다. 그는 그것이 첫 상영 되던 날 화면으로 달려오는 열차가 진짜 열차인지 알고 놀라 도망가던 관객들을 기억했다. 사실 비밀이지만 그도 놀라 날개를 약간 퍼덕였다. 그는 그 날 이후로 영화 보는 것을 꽤 즐겨했다.
모든 것이 많이, 빨리 바뀌고 있었다. 겨울 산 능선을 타고 굴러 떨어지는 눈덩이가 점점 커지면서 빨라지듯, 단지 부락을 이뤄 농사를 짓던 인간들은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것을 만들고, 새로움을 찾아 헤매고, 세상에 욕망했다. 천 년, 또 새로운 천 년. 놀라운 변화였다. 찰스는 그들의 곁에서 그 변화를 보며 언제나 작게 미소 지었다.
그는 종종 인간이 되는 자신을 꿈꾸었다.
하지만 찰스가 천사인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 가끔은 하늘로 치솟은 고딕양식의 성당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뺨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세상의 속삭임이 들렸다. 그렇게 떨어져 내리다가 날개를 펴서 땅에 발을 디딜 때면 사람들의 소리가 의식으로 밀려들었다. 찰스는 그 순간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의 소리, 서로 사랑하는 연인의 소리, 출산의 고통 속에서도 아이를 생각하는 어머니와 그런 그녀의 아픔을 대신하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소리, 감옥에 갇힌 죄수의 자유를 갈구하는 소리, 자신을 배신한 이에 대한 분노에 찬 남자의 소리, 매일하는 일에 지겨움을 느껴 불평하는 소리.
아름다운 소리만 들려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그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아름답고 솔직하고 욕구하는 존재였지만 충동적이고 냉담하고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해질 수도 있다. 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웃에게 쏟았다면 역사의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것에 만족해 남의 것을 탐하지 않았다면 세상에는 감옥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자만과 질투로 얼룩진 미움은 자신보다 뛰어난 이를 향하고, 늦은 시간에 일어나 울어대는 아이에게 부모는 짜증을 느낀다. 앞에서는 웃으며 뒤에서는 헐뜯고, 아름다운 이들에게 찬사를 보내며 욕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상 위의 천사들은 그런 면까지도 사랑했다. 인간 특유의 삶과 사랑과 선과 악, 고독까지도. 천사들은, 찰스는 인간이 어디에 기초해있는지 알고 있다.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예전에는 어린아이였고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천국에 가까웠다. 습관도, 주관도, 고집도, 허무도 없었다. 어린아이들은 보석같이 반짝이는 세상을 알고 있고, 하찮은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다. 세상의 많은 어른은 예전 어느 때엔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천사들은 언제나 그들의 곁에서 함께 걷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 잊은 것을 천사들은 알고 있었다. 언제나.
찰스가 그 애를 처음 만난 것은 베를린이었다. 베를린의 겨울, 회색빛 숲에 둘러 싸인 황금의 엘제의 어깨 위에 앉아 그가 그들을 내려다 볼 때, 아이가 문득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어리고 여린 아이였다. 작은 꼬마는 북극곰처럼 털옷에 휘휘 감겨 조금 뒤뚱거리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고 있었다. 코가 추위에 질려있었고, 양 뺨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옅은 색의 눈은 까마득한 높이 위에 있는 찰스와 시선이 마주치자 동그랗게 변했다. 찰스는 왠지 모를 즐거움에 날개를 한번 크게 펼쳤다가 다시 접었다. Mama, Mama! 아이가 털장갑 낀 손으로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왜 그러니 얘야. 사려 깊고 다정한 어머니의 얼굴이 아이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찰스도 그녀와 같이 미소 지었다. 찰스는 그녀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그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저기 천사가 있어요! 그녀는 아이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그녀의 눈은 엘제의 커다란 어깨에 기대어 앉아있는 찰스를 지나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날개에 닿았다. 오, 그래 그렇구나. 그녀는 작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에릭, 서두르자. 곧 눈이 올 거야.
하지만 천사가 저기 있잖아요.
꼬마 에릭이 의문에 차 그녀와 67m 위의 찰스를 번갈아보았다. 아이는 동화나 성화 속에서만 보던 천사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대단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에릭의 어머니는 천사가 높은 탑 위의 황금빛 동상의 어깨에 다리를 흔들며 앉아 있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한 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아들을 이끌었다.
저 천사는 여기 계속 있었단다.
계속이요?
그래, 앞으로도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에릭은 마지못해 어머니를 따라 종종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에릭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찰스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에릭. 잘 가렴. 에릭이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안녕, 천사님. 그게 첫 번째였다.
두 번째. 당시의 에릭은 찰스가 천사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찰스가 날개를 접어놓은 탓도 있었다. 게다가 열손가락을 다 사용하지 않아도 나이를 셀 수 있는 어린 아이가 까마득한 높이에 있던 천사의 얼굴을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애초에 에릭이 본 것은 엘제의 어깨에 앉은 날개달린 사람의 형체였다. 다 큰 어른이라도(물론 그들은 천사를 보지 못하지만)그 이상은 발견하지 못 했을 것이 분명했다. 에릭이 기억하는 건 오직 찰스의 날개였다. 그리고 회색 하늘에서 빛나던 그 푸른 시선. 그러나 색이란 천사에겐 추상적인 개념이다. 찰스는 언제나 에릭을 읽을 수 있었고, 에릭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에릭이 보는 자신에 대해서는 영, 감을 잡지 못했다.
에릭을 두 번째 만나던 날, 찰스는 얼기설기 엮어진 천막 안에서 각종 회색 톤의 의상과 드럼통 위에 올라탄 염소, 무거운 아령을 들어 올리는 근육질의 여자, 유연한 몸짓으로 줄을 타고 위에서 내려오는 공중 곡예사를 보았다. 그 날 그는 파리의 광장에서 춤 추던 연인들을 보고, 비 오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꼭대기에서 축축이 젖은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베를린으로 날아왔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그 때, 며칠 전 보았던 어린 꼬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천막 안에는 어린 아이들과 그 부모들로 가득 차 있고 서커스 단원들은 사랑스러운 관객들을 위해 여러 묘기를 선보였다. 추운 겨울날, 천막 안은 열기로 따스하게 달궈져 있었다. 찰스는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에릭이 찰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무섭지 않을까요?”
에릭의 어머니는 곁에 없었다. 그녀는 밖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수중에 있는 돈은 아이만 서커스 장에 들여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에릭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서커스를 보여주는 것을 포기하는 것보단 자신이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제 내린 눈으로 얼어버린 날씨 속에 서 있어야 했지만 말이다. 그녀는 아이가 즐거워하는 것에 만족했다. 서커스는 에릭이 예전부터 보고 싶어 하던 것이다. 그래서 찰스는 그녀 대신 에릭의 곁에 앉기로 했다. 다행히도 에릭의 오른쪽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에릭의 시선은 막 묘기를 선보이는 공중곡예사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찰스는 에릭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올렸다. 그들은 얄팍한 줄과 서로가 가진 근육의 힘에 의지해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무서워하지.”
찰스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 그대로 말해준 것 뿐이다. 에릭이 찰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남자와 여자를 흘끗 보고는 조심스럽게 찰스의 귀에 속삭였다. 무서운데 왜 저기 있죠, 저 사람들은? 찰스는 에릭의 눈 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에릭은 진심으로 저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건 그들이 꼭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야.”
아이는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찰스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들이 공중에 있는 순간을, 밑의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빛나는 순간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에릭은 그 말을 이해하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찰스는 그 미간에 손을 올려 꾹꾹 펴주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천사들도 나는 것을 무서워하나요?”
나는 것을 무서워하느냐고? 오, 맙소사. 전혀! 찰스는 웃었다. 에릭은 눈이 부시다는 듯 찰스의 얼굴을 보았다. 그 사이 공중 곡예사들이 땅으로 내려오고 광대들이 풍선을 들고 왔다. 주변의 아이들은 모두 그곳으로 달려나갔다. 검고, 희고, 옅은 회색이거나, 진한 회색이거나…. 색을 볼 수 없다는 게 이렇게 슬프다니! 찰스는 아이들의 손에 건네지는 풍선들이 도대체 무슨 색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왜 그런 걸 묻니 얘야?”
사실은 답을 알고 있었으나 천사가 아닌 존재와 대화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 그는 소년에게 기꺼이 질문을 던졌다. 꼬마 에릭은 줄어드는 풍선과 찰스 사이에서 고민했다. 찰스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달고선 에릭의 대답을 기다렸고, 에릭은 풍선을 포기한 듯 말했다.
“천사를 봤어요.”
“오.”
“아주 높은 곳에 있었어요. 아주 아주 높은 곳. 천사들은 평소에 날아다닐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높은 곳을 날아다니면 무섭지 않을까요?”
아이들이 풍선을 들고 우르르 부모들에게로 몰려갔다. 부모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의 손을 잡으며 하나, 둘 천막을 빠져나갔다. 서커스는 끝났다. 서커스 단원들은 흩어진 모래판을 정리하고 객석에 남겨진 쓰레기들을 하나씩 주웠다. 에릭! 천막의 입구에서 에릭의 어머니가 에릭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에릭은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찰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글쎄, 내 생각엔 그들은 그걸 매우 좋아할 것 같은데?”
에릭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어머니를 향해 뛰어갔다. 찰스는 그 귀엽고 어린 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에릭은 입구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기며 찰스를 흘끗 보고는 같이 손을 흔들었다. 에릭의 어머니가 물었다.
에릭, 누구와 인사 한 거니?
옆에 앉았던 아저씨요.
그녀는 아주 이상하다는 듯 에릭과 찰스를 번갈아 보았다. 찰스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냈다. 그러나 찰스는 그녀가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얘가 이상한 소리를 하네. 그녀의 생각이 찰스에게 선명히 들렸다. 에릭은 서커스 장의 사람들이 찰스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다.
오직, 어린 아이들만이 에릭이 찰스와 이야기 한다는 것을 알았다.
찰스는 어머니의 손을 잡은 어린 에릭이 베를린의 겨울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에릭이 잡아당겼던 옷자락이 아직 따스했다.
세 번째 만남은 뒤셀도르프였다. 에릭은 눈 내린 숲에서 스키를 타고 있었고, 찰스는, 오.
“아저씨! 괜찮아요?”
“아직은.”
에릭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채 스키의 날 부분으로 눈 무더기를 파고 있었다. 아버지가 깎아준 스키를 타고 눈 덮인 둔덕을 한참 신나게 내달리던 게 방금 전 일이었다. 바람에 섞인 눈결정이 뺨을 스치고 시야의 옆으로는 눈이 흠뻑 쌓인 침엽수들이 쌩쌩 지나갔다. 어머니가 짜준 목도리도 몸 뒤로 펄럭거렸다. 에릭은 스키 타는 것을 좋아했다. 흰 눈밭의 나무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빠르게 달리는 기분은 다른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이 났다. 춥고 먹을 것이 부족한 겨울에 딱 하나 좋은 점이 있다면 눈이 온 뒤 스키를 타는 것이다. 그래서 에릭은 살을 에는 추위에도 밝은 기분으로 놀 수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전 까지는.
“어른들을 불러올게요! 아저씨, 아저씨?”
에릭은 숫제 펑펑 울었다. 앞을 조금만 더 잘 봤으면 좋았을 걸! 얼른 집에 돌아가서 라트키*를 먹을 생각에 앞을 잘 살피지 않고 달린 것이 문제였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인적 드문 숲이라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탓도 있었다. 에릭의 빠른 스키는 앞에 서 있던 남자를 치었고 남자는 에릭과 부딪쳐(에릭은 아직 작고 가벼웠지만, 속도감이 주는 충격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저 멀리 굴러떨어졌다. 그것뿐이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와중에 벗겨진 에릭의 스키 한쪽이 남자와 함께 굴러가 나무 근처에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던 눈 더미를 건드렸고 결과는 뻔했다. 차갑고 긴 겨울날 동안 사람의 방해 없이 쌓인 눈이 쓰러진 남자의 위로 쏟아진 것이다. 눈 위에서 한 바퀴 가볍게 구른 에릭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어지러운 시야가 제대로 돌아왔을 때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눈 밖으로 비죽이 나온 구두의 앞 코만 보였다.
에릭은 울면서 눈을 파냈다. 하지만 바람에 날릴 때는 가볍던 눈은 추위에 서로 뭉쳐 무겁고 날카로웠다. 얼어버린 결정체가 에릭의 장갑 낀 손을 싸늘하게 식혔다.
“에릭, 우니?”
“아저씨 죽으면 안 돼요….”
히끅 거리면서 눈을 파내던 에릭은 남자가 눈 속에서 낮게 웃는 것을 듣고 설움이 복받쳤다. 이 아저씨는 이 심각한 상황에 뭐가 좋다고 웃는 거람! 독일의 겨울에는 얼어 죽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언젠가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실종되었던 베이커 씨가 눈이 녹는 봄날, 마을로 돌아오는 숲길에서 언 채로 발견된 것은 이미 마을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에릭은 그 뒤로 폭설이 쏟아지는 날에 일을 나가는 아버지의 옷자락을 놓지 못하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심각하기 그지없는 에릭에 비해, 남자는 눈 속에 파묻혀 있음에도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오, 에릭 울지 말렴.”
그런데 내가 이 사람에게 이름을 알려줬던가? 에릭이 언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그런 적은 없었는데. 그 때 에릭의 다른 손에 눈덩이가 아닌 것이 붙들렸다. 부드러운 느낌이었지만 하얀색이기에 아직 얼지 않은 눈이구나, 라고 생각했을 때 남자가 ‘아야!’하고는 다소 어린애 같은 소리를 냈다. 에릭은 남자의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것을 더 세게 쥐었다.
“조심, 에릭! 그거 세게 잡지 마! 오 맙소사.”
그것에서 손을 뗐을 때, 에릭은 다소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눈에 반쯤 파묻힌데다가 흰색이라 잘 구분되진 않았지만 아마도 그것은….
에릭은 곧바로 스키를 치우고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눈을 걷어냈다. 얼어붙은 눈덩이 밑으로 희고 아름다운 날개깃이 보였다. 그것은 겨울 눈 밭에서 더 희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한 쪽을 다 걷어내고 날개를 따라 올라가 남자의 어깨와 가슴, 얼굴에 쌓인 눈을 털어내었다. 거의 정신없이(그렇지만 아주 주의 깊게) 눈을 걷어내는데 15분 정도를 소요한 에릭은 작업을 마치고 허리를 폈을 때, 탄성을 내질렀다. 흰 날개가 눈밭 위에 펼쳐져있었다. 가지런히 모여 있는 날개깃의 사이사이에서 녹지 않은 눈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푸른 눈의 남자는 (누운 채로) 에릭을 똑바로 쳐다보며 인사했다.
“안녕, 꼬마 에릭.”
그의 눈은 뒤셀도르프의 숲 속에서 유일하게 푸른색이었다.
“에릭, 늦었구나. 식사해야지?”
집으로 우당탕 뛰어 들어온 에릭을 에릭의 어머니는 반갑게 맞아들였다. 해가 거의 저물어 가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어린 아들이 걱정되어 나가볼까, 하던 찰나였다. 남편은 마을의 일이 바빠 들어오지 못한다. 집에 들어선 에릭의 양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있었다. 그에 반해 장갑과 바지는 눈이 녹아 흠뻑 젖어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으로 에릭이 평소보다 더 야단스럽게 놀았을 것이라 지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어리다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크는 법이다. 하나뿐인 아들이었지만 그녀는 아이를 무조건 감싸며 키우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가르침에 따라 에릭도 나약한 아이로 자라지 않았다. 에릭은 영리했고 상냥한데다가, 힘들고 배가 고파도 칭얼거리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그것이 에릭 나름대로 부모를 배려하는 것이란 걸 알았다. 어렵고 모자란 환경에서도 에릭은 어린 천사처럼 순종적이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런 아들이 주위에 또래가 없음에도 외로워하지 않고 커가는 모습은 충분히 대견스러웠다.
그녀는 에릭에게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옷부터 갈아입고 오라 일렀다. 부엌에서 풍기는 맛있는 냄새에 에릭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곧이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벗고 모자와 장갑과 목도리를 모조리 던져놓은 채 바지를 갈아입고 다시 나오려던 에릭은 문득 멈춰섰다. 찰스가 에릭이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옷가지를 가리켰다. 에릭은 푹 젖은 옷가지들을 주워 빨랫줄에 널어놓았다. 녹은 눈이 물이 되어 뚝뚝 떨어졌다. 찰스는 에릭에게 미소 지었다. 에릭도 그에게 미소 지었다.
하누카*기간이라 식탁에 푸짐히 올라온 음식들이 촛불에 일렁였다. 에릭의 어머니는 음식을 권하며 에릭에게 말했다.
“에릭, 밤이 빨리 오니 늦게까지 나가놀지 말렴. 위험하단다. 더 늦게 왔으면 찾으러 갈 생각이었어.”
“네에. 앞으로는 빨리 들어올게요.”
에릭은 라트키를 잘라 먹다 흘끗 옆을 돌아보았다. 찰스가 에릭을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그의 날개가 촛불에 비쳐 은은하게 빛났다. 결 좋은 날개들은 언제 눈에 파묻혔냐는 듯 희고 부드럽게 빛났다. 찰스의 눈은 촛불에 비쳐져 약간 호박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에릭은 눈밭에서의 찰스를 떠올렸다. 하늘처럼 밝은 푸른 눈. 뒤셀도르프의 흐린 햇살 속에서도 그 눈은 병에 담긴 푸른 잉크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니면 그리스의 바닷물처럼. 깜박이는 눈을 보며 어린 소년은 서커스에서의 찰스의 눈과 전승기념탑 위의 동상 어깨에 앉아 있던 찰스의 시선 또한 떠올렸다. 소년은 그 시선을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에릭은 입안에서 씹히는 라트키의 맛이 어떤지조차 잘 알 수 없었다.
“난 아저씨를 본 적이 있어요.”
에릭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라니, 단어 선택이 잘못 됐다. 천사님이라고 불러야 했을까? 에릭이 당황해서 눈동자를 굴리고 있자, 남자는 그 말에 씩 웃고는 몸을 일으켜 앉은 후 날개를 한번 퍼덕였다. 눈가루가 허공에 흩날렸다. 아니, 흩날렸다기보다는 날개를 통과해 땅에 내려앉았다. 남자는 날개를 대충 빗질해 다듬고 눈밭에 앉은 채로 이마 위로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에릭은 일련의 과정을 보며 뺨이 발갛게 달아오름을 느꼈다. 우와, 내 앞에 지금 뭐가 있는 거지? 베를린의 전승기념탑에서 보았던 천사가 분명했다. 에릭은 그 때의 그 푸른 시선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까마득한 높이에서도 별처럼 빛나던 시선이었다. 흐린 회색의 베를린 하늘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갖고 있던 것. 그리고 에릭은 서커스 천막 안에서 보았던 낯선 남자를 왜 쉽게 잊을 수 없었는지 깨달았다. 그 남자의 눈도 천사와 같은 푸른색이었다.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남자도 그 푸른 눈으로 다정하게 에릭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 달린 날개는 얌전히 접혀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오, 물론 에릭. 나도 널 본적이 있지. 베를린에서. 그렇지?”
남자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찰스.”
“찰스?”
“그래. 아, 너는 미카엘이나 가브리엘같은 그런 이름을 기대했나 보구나.”
에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았지?
“방금 ‘어떻게 알았지?’라고 생각했지?”
에릭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찰스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짚어보였다. 천사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단다. 네 이름도 이렇게 알았지. 찰스가 속삭였다. 에릭이 ‘우와.’라고 감탄하자 날개가 한번 작게 퍼덕였다. 순간 에릭은 그 날갯짓이 왠지 좀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찰스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흰 종이에 붉은 물을 들인 것 같았다.
“그야, 자랑할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야.”
“뭘요?”
에릭이 그렇게 묻자 찰스는 쑥스러운 듯 눈을 한번 데구르르 굴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 마음이 들리는 거?”
“하지만 굉장해요!”
“다른 천사들도 다 들을 수 있어.”
“그래도 저는 다른 천사들을 만난 적이 없는 걸요. 또 다른 건 없어요?”
모자에서 토끼를 끄집어내는 마술사를 본 듯한 반응에 찰스가 아이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찰스의 손이 에릭의 뺨을 문질렀다. 처음에는 아주 조심스러웠지만, 곧 대범하게 에릭의 볼을 꼬집었다. 아얏, 에릭이 엄살을 부리며 찰스의 손에 제 손을 올렸다. 찰스는 순간 놀란 듯했지만 곧 말갛게 웃으며 나머지 손을 뻗어 에릭의 코를 장난스럽게 꼬집었다.
“넌 좀 특별한 아이구나.”
“그래요?”
“원래 사람들은 천사들을 보지도 못하거든. 아이들은 가끔 보지.”
그렇지만 이렇게 만질 수는 없었는데. 중얼거리는 찰스를 보며 에릭은 그제야 어머니가 왜 천사를 못 보았는지 알았다. 그리고 조금 묘한 기분도 들었다. 남들은 볼수도, 만질수도 없지만 에릭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천사.
꼬르륵
순간 배에서 울린 소리에 에릭의 얼굴이 삽시간에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밥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났다. 어머니가 집에서 기다리실 것이다. 숲도 아까와는 달리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찰스는 빙긋 웃고는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흩어진 스키들을 가리켰다. 어서 챙기렴 에릭. 오늘의 일몰은 어제보다 더 빠르단다. 곧 해가 질거야. 다정한 목소리에 에릭이 망설이듯 물었다.
“같이 가나요, 찰스?”
그러니까, 저랑요. 작게 속삭인 소리에 찰스가 에릭을 보며 귀엽다는 듯 눈꼬리를 접었다. 물론이지, 꼬마 친구. 에릭은 찰스의 대답에 환하게 웃었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에릭은 곧 방으로 들어가 따뜻하게 덥혀진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오늘밤 아버지는 못 오실 게 분명했고 겨울의 해는 짧기 그지없어 바깥은 깊은 어둠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숲이 아닌 마을 쪽은 하누카를 위한 불을 밝혀놓아 반딧불처럼 빛을 내었다. 에릭은 하품을 했다. 바쁘고 놀라운 날이었다. 천사와 접촉사고를 낸 후, 눈 속에서 파내다니. 어린 소년에게는 너무너무 피곤한 작업이었다. 피로에 지쳐 잠에 빠져드는 와중에도 저도 모르게 키득거리자 찰스가 다가와 턱을 괴고 에릭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넌 아마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에 제일 가까울 거야.”
아무나 천사를 만질 순 없겠지. 넌 정말 선한 아이인가 보구나. 흰 날개 끝이 에릭의 뺨을 간질였다. 희끗하고 공기처럼 가벼운 깃털이 스치는 느낌은 마치 미풍에 비눗방울이 터지는 것 같았다. 에릭은 조용히 천국을 상상해보았다. 찰스같은 날개를 달고 다니는 천사들과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 그리고 아름답고 따스하며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을 영원의 낙원. 수면욕이 물결처럼 밀려오는 와중에 에릭은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어 찰스에게 물었다.
“천국은 아름답나요?”
찰스는 에릭의 물음에 부드럽게 웃었다. 에릭은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린아이처럼 해사해보이기도 하고 관록이 있는 중년이나, 아주 오래 산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외관적인 이미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눈가에 진 주름은 나이를 나타낸다기보다는 공기처럼 존재했다. 그저, 찰스의 일부분이었다. 찰스는 아주 부드럽게, 산양에게서 갓 짜낸 젖이나, 잘 익은 치즈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에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간질간질하고 따스한 느낌에 에릭은 곧 꿈도 없이 깊이 잠들었다. 찰스는 잠든 에릭의 머리맡에 대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스포일러.”
에릭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평생 알 수 없었다.
찰스는 겨우내 에릭의 곁에 머물렀다. 겨울에 잠긴 뒤셀도르프는 고요했지만, 에릭은 찰스가 곁에 있는 하루하루가 봄날 싹을 틔우려 아우성치는 숲처럼 생기 넘침을 알았다. 소년의 천사는 언제나 에릭의 곁에서 함께 걷고 있었다. 같이 걷는 걸음걸음에 찰스의 발자국이 에릭의 발자국과 함께 남겨지는 일은 없었지만, 어린 소년은 못내 그 시간이 좋았다. 흰 눈이 벌판에 쌓이듯 켜켜이 쌓여가는 그 시간이 좋았다.
에릭의 마을에는 아이들이 드물었다. 에릭보다 어린 아이나 더 큰 아이들은 있었지만 에릭 또래는 전혀 없었다. 뒤셀도르프의 구석에 있는 마을은 겨울이면 눈 속에 파묻혔고 봄이 오면 깨어났다. 아주 작은 마을이었기에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그 때문에 외부 사정엔 어두운 편이었다. 대신 이웃의 사이가 돈독했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 우애가 깊어 보이는 것처럼 그들은 서로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후의 바이마르 체제에서도 그들의 마을에 있는 유대인들을 핍박하거나 질시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들과 같은 인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만 찰스는, 가끔 아주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에릭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바깥에 나가는 것이 금지되자 에릭은 다락방에서 찰스와 함께 놀았다. 호기심이 많고 영리한 아이에게 천사는 좋은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게다가 찰스는 다정하고 상냥하며 지상 위의 어느 선생보다도 아는 것이 많았다. 작고 고립된 마을에서 지식의 최소한만을 습득할 수 있었던 에릭은 찰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다빈치, 보티첼리, 렘브란트, 엘가, 브람스, 베토벤, 셰익스피어, 뒤마, 알렉산드로스, 루이 14세, 빌헬름 1세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찰스의 이야기는 개량되거나 위조되지 않은 완벽한 날것이었다. 에릭은 아침을 먹으면 부리나케 다락으로 올라가 의자를 찰스 곁으로 바싹 끌고 와 앉았다. 그러고는 눈을 반짝이며 찰스를 재촉하고는 했다. 그리고 찰스는, 에릭을 위해 그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었다.
“피렌체 관리가 미켈란젤로에게 다비드 상의 코가 너무 높다고 불평하며 더 다듬어야겠다고 참견했을 때,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의 코를 다듬는 척 하면서 대리석 가루를 떨어뜨렸지. 그리고 그걸 보며 그 관리는 매우 만족했단다.”
그 때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네가 봤어야 했는데! 난 그의 광대가 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 말에 에릭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찰스는 미켈란젤로가 평소에 얼마나 괴팍했는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깔보았는지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결점을 가지고 있어도, 그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단다. 그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열정이 살아 숨 쉬었고 신을 향한 사랑이 불타고 있었지. 딱딱한 돌덩이를 깎아내어 그들의 숨겨진 영혼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준 사람은 인류 역사상 그리 많지 않아.”
그래서 사람들은 예술가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 자신들이 평소 보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 그냥 지나쳐버리는 걸 예리하게 집어내어 풀어놓는 이들이거든. 다소 괴팍하고 오만해도 그건 일종의 애교지. 그들의 집중력과 인내는 사람들이 아닌 세상에 쏟아지니까.
에릭은 그렇게 말하곤 하는 찰스에게서 인간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끼고는 했다. 그는 에릭에게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스쳐 지나간 예술가들과 지도자들, 철학자, 사상가, 왕, 건축가, 의사, 이발사, 성직자, 농부, 집시, 광대, 그리고 아주 평범하여 역사에 한 톨도 흔적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골고루 들려주었다. 그리고 에릭이 그들 모두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찰스는 가감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가끔 너무 현실적이라 끔찍한 면도 있었지만 사랑이 담겨 있었다. 인류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고요히 지켜봐 온 천사는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가라앉은 선함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의 본질을 알았다. 그래서 천사는 어린 소년이 인간의 본질을 언제나 상기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을 사랑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은 에릭이 찰스에게 배운 가장 큰 가르침이었다.
찰스는 에릭에게 체스도 가르쳐 주었다. 다락 구석에 처박혀 있던 체스판을 발견한 찰스는 말의 이름과 룰을 알려주고는 곧장 게임에 들어갔다. 물론 찰스는 말을 움직일 수 없기에 찰스가 불러주면 에릭이 옮기는 식이었다. 몇 번 그렇게 게임 같지도 않은 게임을 하고 나자 에릭도 익숙해졌는지 제법 영악하게 말을 움직였다. 며칠이 지나자 둘은 곧 서로 잡아먹을 듯이 게임을 진행했고 마지막은 언제나 에릭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지못해 자기 킹을 쓰러뜨리는 걸로 끝이 났다. 그리고 찰스는 체크 메이트를 외치며 다락 안을 요란스럽게 날아다녔다. 에릭은 그걸 보며 아니꼬운 듯 ‘깃털 떨어져요, 찰스.’라고 하곤 했는데 사실 찰스의 날개에선 솜털 하나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이 식을 대로 식어, 이제 달구어질 일만 남았을 때, 에릭은 가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예를 들면 다락 구석에 있는 의자 같은 것들. 며칠에 한 번씩 하던 낙서는 어느새 숫자가 늘어 에릭의 헌 스케치북을 가득 채웠다.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놀던 테디베어, 어머니의 보석함, 말린 꽃다발, 아버지의 낡은 신발, 그리고 창가에 앉은 찰스. 에릭은 온 집안을 뒤져 거의 말라비틀어진 물감과 수세미 같은 붓을 찾아내어 그림에 색을 입혔다. 물감이 진하지 않아 거의 물을 바르는 식이었지만 에릭은 만족했다. 나름대로 첫 작품이었다.
에릭이 그림을 완성해서 찰스에게 보여줬을 때(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에릭은 그림의 귀퉁이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림을 온몸으로 가리거나 찰스를 방구석으로 쫓아내는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찰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해줬었나? 난 루벤스의 어린 시절도 알고 있지. 그는 물론 위대한 화가지만, 언제나 처음은 형편없기 마련이란다.”
그 말을 웃는 얼굴로 해서 찰스는 에릭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날개를 퍼덕거렸다. 찰스는 아픔에 약했다. 하기야 천사들이 치고받고 싸울 일이 있겠는가. 나중에 고백하길, 그를 눈밭에서 파낼 때 에릭의 손에 잡혔던 것은 찰스의 등에서 바로 솟아나온 날개의 뼈대였고, 에릭이 그걸 너무 꽉 잡아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했다. 찰스는 덧붙였다. 천사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해서 눈물을 낸 인간은 너밖에 없을 거야, 에릭. 네가 최초야. Human and Proud! 에릭은 조용히 찰스의 발을 밟았다.
“그냥 잘 그렸다고 해 줘도 되잖아요.”
“못 그렸다는 소리는 안했잖니.”
“처음은 언제나 형편없다는 소리가 그거죠, 뭐.”
찰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에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페이지를 넘겨보렴. 그래서 에릭은 그렇게 했다. 찰스는 진지하게 그림들을 들여다보았다. 에릭은 괜히 부끄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찰스가 마침내 마지막 장까지 꼼꼼히 살펴보았을 때, 에릭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냥 보여주지 말걸.
“좋아, 인정하지 나의 꼬마 에릭.”
찰스가 고개 숙인 에릭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그는 종종 에릭을 ‘나의 꼬마 에릭’이라 부르곤 했는데 그 어감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에릭이 ‘난 엄마아빠의 에릭인데요.’라고 까칠하게 대답하자 시무룩해져선 ‘그럼 너도 나를 ‘내 천사님’이라고 불러도 돼.’라고 속삭였다. 아홉 살의 에릭은 어린 나이에도 그 말이 굉장히 간지러운 단어의 조합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의 천사 찰스’로 타협을 보았다. 나중에야 에릭은 타협안이 더 심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넌 재능이 있어.”
“…정말요?”
“오 물론. 넌 훌륭한 화가가 될 거야.”
색감은 터너인 것 같은데, 난 색을 알 수 없으니 그런건 넘어가도록 하자꾸나. 찰스가 에릭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에릭은 재능이 있다는 찰스의 말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뒤이어지는 말에 멍해졌다.
“색을 알 수 없다뇨?”
찰스가 말간 얼굴로 에릭을 내려다보며 응? 하고 되묻다가 혼란스러운 마음을 읽고는 아, 하고 혼자 납득했다.
“미안. 이런 주제가 나올만한 상황이 없어서 이야기를 안했었네.”
에릭이 찰스를 멍하니 올려보았다. 찰스는 난감하게 머리를 긁더니 설명했다.
“천사들은 색을 못 봐. 우리는 세상이 모조리 톤이 다른 회색으로 보이거든. 아니면 희거나, 검거나. 그리고 맛도 못 느끼고…. 내가 냄새란 걸 맡아 본 적이 없으니까 후각도 없을 거야. 천사들끼리는 서로 만지기도 하지만 글쎄, 지구 위의 사물을 만졌을 때 딱히 어떤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니니 촉각도 없을 것 같구나.”
애초에 없는 개념을 설명하려니 당황스러웠지만 찰스는 열심히 설명했다. 아, 네가 만질 때는 물론 느낌이 와. 다른 걸 만질 땐 아무 느낌도 안 나지만. 그냥, 음, 만진다는 느낌은 나는데 따스하다거나, 부드럽다거나, 거칠다던가 하는 그런 표현은 이해할 수 없더구나. 에릭은 혼란스러운 와중에 서서히 이해하는 듯 했다. 그리고 색맹에, 미각이 마비되고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고 무엇을 만지든 느낌이 없는 자신을 상상하고 있었다.
“…상상이 안 돼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에릭은 정말 상심해 있었다. 찰스가 그 애를 읽었을 때, 에릭은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정성껏 칠했던 찰스의 눈을 떠올리고 있었다. 서툰 솜씨에 좋지도 않은 재료였지만 소년은 온 힘을 기울였다. 물감들을 섞어보기도 하고 물을 아주 많이 타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윽고 거의 비슷한 색을 얻어냈을 때에야 그것을 칠했다. 진짜 찰스의 눈과 똑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위안 삼았다. 본인에게 보여주고 닮았느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는 것 까지 읽었을 때, 찰스는 천사가 색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처음으로 슬퍼졌다.
“하지만 에릭, 색을 보지 못해도 네가 그린게 나라는 건 알아. 처음인데 정말 잘 그렸어.”
“그래도….”
알려주고 싶었는데. 어떤 느낌인지.
에릭은 스케치북을 잘 정리했다. 언젠가 찰스에게 그의 눈이 어떤 색인지 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베를린에서 처음 그의 시선을 받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어떤 색감이었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표현해보고 싶었다. 그 푸른 색. 빛에 따라 아주 밝게 빛나기도 하고 어둠을 먹은 것처럼 가라앉기도 하는 푸른색 눈. 터키쉬 블루에 물을 탄 것 같기도 하고 아주 맑은 샘물 색 같기도 했다. 지중해의 하늘같기도 하고 중국산 청자의 색이거나, 아니면 푸른 수국 색.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찰스에게 추상적인 개념일 터였다. 하지만 에릭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온갖 색채의 향연은 찰스의 가슴 속에 촉촉이 스며들어왔다. 비록 그것을 에릭과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없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소중한 느낌이었다. 찰스는 셰익스피어가 끙끙대며 묘사한 흰 피부와 붉은 입술과 검은 머리를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마 그 때 조금 더 노력했다면 에릭을 이해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분명 이해할 수 있었을 터다.
그리고 그랬으면, 정말 좋았을 것이다.
찰스는 에릭과 놀지 않을 때면 창가에 서서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겨울 햇빛은 창을 통해 쏟아졌고 찰스의 눈은 맑게 빛났다. 물감이 지닌 푸른색이나, 바다의 푸른색도 아닌 아주 오묘한 물빛이었다. 그럴 때의 찰스는 흰 날개를 금방이라도 퍼득일 듯 천천히 길게 늘어뜨렸다가 다시 접는 것을 반복했다. 에릭은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왠지 찰스가 그대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눈밭에서 찰스를 파낸 이후로 찰스가 에릭의 곁에서 떨어졌던 적은 없었지만, 만약 어디론가 가버린다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천사들은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도 바다를 건널 수 있고, 생각만 하면 원하는 곳으로 갈 수도 있다고 찰스가 말했다.
에릭은 언젠가 찰스가 자신을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자 침울해져 구석의 낡은 침대 위에 앉았다. 그리고 마침 거기까지 펴져있는 날개깃을 들어 올려 쓰다듬었다. 희고 부드러운 날개는 햇빛에 비쳐 매끄럽고 따스하게 빛났다.
“찰스, 날개 손질은 하세요?”
“에릭, 천사들은 털 고르는 원숭이가 아니야.”
그럼 씻지도 않아요? 천사날개는 자동 세척돼서 그런 거 필요 없어. 찰스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하며 날개를 흔들었다. 작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날개가 신기해 에릭이 무의식중으로 말했다.
“깃털 하나만 뽑으면 안 돼요?”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접혀서 에릭의 손에서 벗어난 날개가 바르르 떨린 것도 같았다.
“에릭, 내 날개에 손대지 마.”
“고작 하나 달라는 건데 치사해요, 찰스.”
“하나든 두 개든 뽑는 건 똑같잖아. 절대 안 돼.”
네 손길은 언제나 무자비하잖니. 그 말에 에릭은 볼을 부풀리며 툴툴거렸다. 아 거참 한번 그런거 가지고 정말 오래가네. 정말 천사 맞아요? 그 말을 끝으로 에릭은 이불 속으로 쏙 파고들었다. 찰스가 바깥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에릭? 에리익? 에릭, 화났니? 에릭? 그 후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릭은 괜히 불안해져 귀를 기울였다. 혹시 삐쳐서 날아가 버렸나? 날개가 퍼득이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으나 에릭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괜히 욕심을 냈나보다. 어디론가 가버릴 것 같은 찰스의 모습에 흔적이라도 남겨놓고 싶어 억지를 부렸다. 아픈걸 딱 질색하는 찰스가 싫어할 것을 빤히 알면서. 그래도 난 찰스가 가는 곳에 같이 갈 수 없잖아. 찰스가 없는 건 싫어. 에릭은 조금 훌쩍이며 어머니가 언제나 목에 걸고 다니는 펜던트 목걸이를 떠올렸다. 한쪽에는 에릭이, 또 한쪽엔 아버지의 사진이 끼워져 있는 작은 목걸이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이 많아 들어오지 못할 때면 그 펜던트를 들여다보고는 했다. 에릭은 찰스의 날개를 보며 그걸 생각했다. 깃털이라도 있으면 그래도 괜찮을 지도 몰라. 찰스가 떠났을 때를 대비해서. 단 하나라도 나에게 남겨져 있다면.
“아얏!”
“찰스?!”
순간 날 선 비명이 들려와 깜짝 놀란 에릭이 이불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뭐라도 들어왔나? 혹시 어디 부딪쳤을까?(생각해놓고는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에릭은 얼굴을 붉혔다. 바보 같기는!) 눈앞에는 날개를 잔뜩 움츠리고 오만가지 인상을 쓴 찰스가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주 아파보여서 에릭은 걱정스레 물었다.
“찰스, 어디 아파요?”
천사가 아프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근데 천사가 아프기도 하나? 다친 걸까? 아프면 약을 먹어야 하는데. 에릭이 대답하지 않는 찰스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에릭, 그만 돌아. 마침내 찰스가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을 때 에릭은 후다닥 찰스의 앞에 섰다. 찰스는 주먹을 에릭 앞에 내밀었다.
“자.”
찰스의 손안에는 아주 자그마한 깃털이 들어 있었다. 아주 하얗고 작고 솜털같이 부드러운 것. 잘못해서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 같아 에릭은 깃털을 아주 조심히 들어올렸다. 햇볕의 따스한 냄새가 났다.
“나의 꼬마 에릭.”
찰스가 웃었다.
“난 널 안 떠나. 네 곁에 있을 거야. 언제나.”
“정말요?”
“그래. 내 날개를 걸고 맹세할게, 요 장난꾸러기야.”
에릭의 이마를 가볍게 튕기며 찰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슬픈 생각 하지 마. 뭘요? 내가 떠나는 생각.
“그래서… 깃털을 뽑은 거예요?”
“네가 슬퍼하는데 별수가 있나.”
에릭은 서랍에서 작은 펜던트 목걸이를 꺼내 깃털을 넣었다. 그리고 얌전히 목에 걸었다. 찰스가 에릭의 작은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았다.
“근데 찰스, 많이 아파요?”
“근 6천 년 중 제일 최악이었어. 다시는 이런 일 하게 만들지 마.”
“…찰스 늙었어요.”
“오, 이런. 칭찬 고맙구나.”
찰스가 소리 내어 웃으며 에릭의 뺨에 제 뺨을 문질렀다. 내가 널 어떻게 떠나겠니. 찰스는 어린 에릭을 처음 보았던 베를린을 떠올렸다. 고작 몇 달 전인데도 아주 오래된 것 같았다. 6천 년을 넘게 지구 위에 있었지만 1시간도, 1일도, 1년도, 100년도 사실 천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천사들에겐 ‘시간’의 개념이 없다. 색을 보지도, 냄새를 맡지도, 맛을 느끼지도, 손가락 끝으로 촉감을 구분하지도 못하는 지상 위의 천사들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없다. 그들의 시간은 멈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을 사랑한다. 그들의 기쁨에, 슬픔에, 분노에, 절망에 기대며 잠깐 동안 세상과 사랑에 빠진다. 천사들은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없기에, 인간의 이야기에 기대어 그것을 듣는다. 찰스도 그래왔다. 이 작고, 어린 소년을 만나기 전까지.
가끔씩, 찰스는 멈춰있는 시계의 초침이 움직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천 년의 세월도 찰나일 뿐이었는데, 꼬마 에릭과 함께한 겨울은 수면 위의 햇살처럼 빛나고 고인 물처럼 천천히 흘렀다. 찰스는 여전히 하루하루의 일출과 일몰이 언제였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 되었다. 찰스의 커다랗고 공허한 세계에는 어느새 에릭이 가득 차 있었다. 찰스는 그 어린 소년을 사랑하고 있었다. 에릭의 선함과 어린아이다움과 솔직함, 영리함,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빛나는 영혼까지 사랑했다.
내가 어떻게 널 떠날 수 있겠니.
그는 그가 영원히 소년을 떠나지 못할 것임을 가슴 깊이 느꼈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찰스는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는 에릭을 날개로 감싸 안았다. 전혀 나쁘지 않아. 천사들에게도 중력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 터다. 찰스는 작게 웃었다.
“에릭, 요즘 다락에서 무얼 하니?”
따스한 오전의 햇살이 집안을 물들였다. 에릭은 앞에 놓인 빵을 우물거리며 어머니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냥… 이것저것요.”
에릭의 어머니는 요즘들어 시름에 빠져 보였지만 어린 아들에게만큼은 다정했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에릭의 접시에 햄을 잘라 올려주었다. 간만에 풍성한 식탁에는 에릭이 좋아하는 음식이 많았다. 에릭은 해맑게 웃으며 어머니가 직접 만든 빵을 먹고 우유를 마셨다. 찰스는 옆에서 에릭이 음식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도 오랜만에 해가 쨍쨍한 시간에 집에 머물러 계셔서 에릭의 기분은 평소보다 더 들떠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일에 지쳐, 혹은 그와는 다른 이유로 침울해 보였지만 원래 어린 아이들이란 어른들이 슬퍼하는 이유를 잘 모르는 법이다. 에릭은 올해의 겨울에 대해 생각했다. 희고 차가운 겨울은 스키를 타는 것이 아니면 마냥 지루했지만 올해는 아니다. 에릭은 햄을 썰어 입에 넣으며 숨겨두었던 자랑거리를 꺼내들었다.
“요즘 그림을 그려요.”
소년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의외의 화제에 놀라 눈이 동그래지며 그를 한차례 쳐다보고 서로 마주 보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자랑스러운 마음에 뺨이 약간 발그레해졌다.
“어머, 그래? 에릭이 그림을 그릴 줄은 상상도 못했는걸.”
“오, 누가 알아. 미켈란젤로만큼 재능이 있을지?”
말이 없던 아버지까지도 주름이 자글한 눈매를 접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에릭이 음식을 먹다말고 다락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다만, 소년이 들고 온 스케치북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이야, 정말 잘 그렸는걸! 아버지는 에릭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천사를 그렸구나, 에릭. 정말 예쁘네! 다음에는 엄마를 그려주지 않겠니? 어머니는 어린아이가 끙끙대며 칠했을 천사의 날개를 쓸어보며 웃었다. 찰스는 에릭의 곁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어깨에 한손 씩 올리고 허리를 굽혀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그들이, 특히 자신을 그린 그림에 시선을 멈추고 감탄하는 모습을 보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다정한 부부 사이에 내려앉은 천사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지만 부부는 찰스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오직 에릭만이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은 걱정과 시름에 젖어 있던 마음이 천천히, 따스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침울했던 식사시간이 예전처럼 활기가 돌았다. 에릭은 왠지 뿌듯해져 방긋 웃었다. 그리곤 속으로 속삭였다. 사실 그림말고 체스도 배웠고 역사공부도 하고 있어요. 이것저것 신기한 이야기도 많이 들어요. 엄마아빠, 비밀이지만 제 선생님은 천사예요! 뭐라도 더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에릭은 입을 꾹 다물고 입술 끝만 올려 웃었다. 비밀로 한 이유는 별게 없다. 소년은, 찰스가 깊은 숲 속에 숨겨놓은 비밀기지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침대 밑의 보물 상자. 아무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런. 에릭은 가슴을 간질이는 달콤한 느낌에 소리 죽여 웃었다. 찰스도 그 생각을 알고 있는지 부부 사이에서 고개를 들어 빙긋 웃어 보였다. 목에 닿은 펜던트가 따스했다.
“날 들고 날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요?”
에릭의 물음에 찰스가 매우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별로 도전해보고 싶지 않은데?”
날이 제법 풀렸다. 이대로라면 곧 봄이 올 것이다. 에릭은 삽으로 녹은 눈을 치우며 울타리에 내려앉은 찰스를 힐끔거렸다. 찰스는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옷차림이었고 그의 검은 코트는 울타리에 쌓인 눈에도 젖지 않았다. 눈 위에도 자국 하나 남지 않은 채 깨끗했다.
“하긴, 찰스가 날 들고 날 수 있을 만큼 힘이 세 보이진 않네요.”
“그거 칭찬은 아니지?”
“물론이죠!”
에릭은 깔깔거리더니 코를 문질렀다. 봄이 올 테지만, 그래도 역시 춥다.
“그냥, 체스 말고 같이 할 수 있는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무거나.”
공놀이 같은 거요. 찰스는 에릭의 솔직한 말에 빙그레 웃었다. 울타리 위에 앉은 천사의 얼굴 위로 겨울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푸른 눈의 남자는(날개는 ‘접혀서’ 보이지 않았다. 날개가 보일 때와 보이지 않을 때의 차이를 묻자 찰스는 매직트릭! 이라며 웃기만 했다. 생체 메커니즘이 다르단다, 에릭. 천사가 생물이라면 말이지. 에릭은 당연히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웃으며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이야기 하면 되잖아.”
“우린 맨날 이야기 하잖아요, 찰스.”
“오, 그러니까 이야기‘만’하는 게 불만이라는 거야 에릭? 하지만 내가 뭔가를 만질 수 있었더라도 공놀이는 절대 안했을 거야. 네가 내 머리를 날려버릴 거 같거든.”
에릭은 볼을 부풀리며 삽으로 눈을 퍼서 찰스에게 던졌다. 녹아서 약간 무른 눈이 찰스의 위로 쏟아졌다. 하지만 눈은 찰스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찰스는 옷을 터는 단순한 행위도 하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나도 너랑 다른 뭔가를 하고 싶긴 하지만, 천사들은 대체로 이야기 하는 것이나 보는 것이 특기거든. 다른 건 해본 적도 없고. 나랑 공놀이해도 별로 재미있진 않을 걸?”
에릭은 둘이서 공놀이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에릭은 공을 차고, 찰스는… 음.
“에릭, 그만.”
“근데 찰스는 정말 운동 못할 거 같아.”
“그것 참 고맙구나.”
에릭이 키득거리며 치운 눈더미에서 삽을 빼내며 툭툭 털었다. 집 앞은 대부분 치운 셈이다. 차가운 겨울밤에 낮에 녹은 눈이 얼어붙어서 생길 귀찮을 일은 해결이었다. 쪼르르 달려가 창고 안에 삽을 넣어두고 온 에릭은 찰스의 소맷부리를 잡아당겼다. 우리 산책해요, 찰스. 다행히 날은 따끈했다. 평소의 겨울이라면 뺨이 바짝 얼어버릴 추위를 자랑했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눈이 반절이나 녹을 정도로 따스한 편이다. 바람이 불면 추웠지만 에릭은 아무래도 좋았다. 목도리를 제대로 감아 얼굴을 푹 감싼 에릭은 곁으로 따라붙은 찰스의 손을 잡았다. 체온도 뭣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자신이 그를 잡았다는 것은 알았다. 에릭은 찰스와 함께 걸으며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천사들은 많은가요?”
“물론. 많지.”
“왜 우리 마을에는 보이지 않을까요? 난 찰스 외에는 천사를 한명도 못 봤어요.”
“보이지 않다기보다는, 있긴 있는데 천사인줄 몰랐을 걸? 날개를 접어두면 그냥 사람같이 보이니까.”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찰스에게 날개는 일종의 아이덴티티다. 날개가 없었다면 에릭의 시선에 보인 그는 그냥 평범한 남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에릭은 그를 못 본채 그냥 지나쳤을 테고, 봤다면 비명을 질렀겠지. 엄마, 저 위에 사람이 있어요!
“뭘 좋아해요?”
“천사가? 아니면 내가?”
에릭이 딴청피우는 찰스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찰스가 키득거리더니 에릭의 손을 놓고 앞으로 나서서 배우처럼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군더더기 없는 행동이 뜻밖에 날렵해서 에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찰스의 발밑은 여전히 깨끗했다. 찰스는 몸이 가벼운 요정처럼 눈 위에 흔적도 없이 서 있었다.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소리가 좋아. 아이의 웃음이나,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의 소리 같은 거.”
말을 마친 찰스가 웃으며 손짓했다. 에릭은 한 발짝 앞선 찰스의 품에 거의 뛰어들다시피 했다.
“그리고 지금은 네가 제일 좋구나, 에릭.”
찰스의 웃음소리가 에릭의 귓가를 간질였다. 소년은 볼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찰스의 코트에 볼을 부볐다. 공기 냄새가 났다. 새벽녘 아침 공기처럼 입자가 알알이 느껴지는 냄새였다. 기묘한 느낌이다.
“이 기분이라면 널 들고 날아오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지금은 안돼요.”
“왜?”
“오늘 엄마랑 아빠가 집에 계시잖아요. 날고 있는 우리를 보면 깜짝 놀라실걸요. 사람들은 천사가 보이지 않는다면서요.”
밑에서 보면 나만 혼자 둥둥 떠 있는 거 같을 거야. 그새 에릭이 상상하는 걸 읽었는지 찰스가 크게 웃었다. 그래, 그럼 지금 말고 나중에. 잊어버리지 말아요 찰스, 분명 나중이라고 했어요? 찰스는 대답대신 에릭을 안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다른 사람이 보았으면 아이가 갑자기 허공에 들려 돌아가는 것으로 보였겠으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잠긴 마을. 햇볕에 눈 녹는 소리만 들려왔다. 찰스와 에릭은 그렇게 손을 잡고 한참을 걸었다. 눈 덮인 땅 위로 한 쌍의 작은 발자국이 총총히 찍혔다.
마을과 숲의 경계에 이르러 울타리가 있자 에릭이 찰스에게 졸랐다. 나 여기 위로 걸어가 볼래요. 찰스는 에릭을 안아서 울타리로 올려 주었다. 찰스의 손을 잡고 얼어붙은 나무 둥치가 얼기설기 엮인 울타리 위를 걸으며 에릭이 물었다.
“왜 어른들은 찰스를 보지 못하죠?”
“그건 그들이 아이였을 때를 잊어버렸기 때문이야.”
찰스는 에릭의 걸음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어린 소년은 천사가 보기에도 위태위태하게 걷고 있었다.
“나도 어른이 되면 찰스를 보지 못할까요?”
“아마?”
에릭이 걸음을 멈췄다. 찰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에릭의 얼굴에 닿았다. 에릭의 얼굴은 아까와는 달리 울적해져 있었다.
“그렇다면 난 어른이 되기 싫어요.”
“네가 어른이 돼도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하지만.”
소년은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찰스는 그의 꼬마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면 찰스가 외롭잖아요.”
아아, 착한 에릭. 내 사랑스러운 아이.
찰스는 자신을 보지 못하는 에릭을 상상했다. 자신은 언제나 곁에 있을 테지만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 자신이 있다는 것을 죽는 순간까지 모를 에릭. 이제껏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천사는 갑작스러운 감정에 눈가를 찡그렸다. 아주 생소한 것이 발밑부터 그를 적셨다. 그 서늘한 느낌에 날개가 파르라니 떨려왔다. 물밀 듯 밀려오는 미련, 안타까움, 그리고….
에릭, 큰일 났어. 내가 외로움을 배워버린 것 같아.
찰스는 울타리 위에 서 있는 어린 에릭을 안아들었다. 아이의 작고 따스한 몸에서 겨울 냄새가 물씬 풍겼지만 찰스는 알지 못했다. 품에서 에릭이 웅얼거렸다. 그리고 나도 외로워요. 찰스가 보이지 않는 건 너무 슬퍼요. 솔직한 고백에 그는 소년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었다. 갑작스럽게 소년의 머리색이 궁금해졌다. 넌, 무슨 색일까? 네 머리는, 네 눈은, 네가 입은 옷은? 하지만 찰스는 소년의 색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에릭, 사람들은 누구나 선한 마음을 지니고 있지. 하지만 그건 세월이 지날수록 진흙 속에 묻힌 진주처럼 돼버려.”
소년이 찰스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진주가 진흙 속에 묻혔다 해도 사라지는 건 아니란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
네 선함도 진주처럼 남아 있을 거야. 그리고 나도 네 곁에 머물러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른인 내가 찰스를 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찰스는 말없이 웃었다. 아이들의 말은 언제나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다. 찰스는 에릭을 다시 꼭 껴안았다. 소년이 어른이 되면, 이렇게 껴안아도 아무것도 모른채 삶을 살아가겠지. 그는 에릭의 마음 깊은 속까지 들여다 볼수 있지만 에릭은 그것을 모를것이다. 내민 손을 붙잡아도, 어깨 위에 손을 얹어도, 그 곁에서 귀를 기울여도 모두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내가 안 보인다고 해서 네가 날 잊어버릴 건 아니잖아.”
“물론이죠.”
에릭은 찰스가 금방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듯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어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어린 동물같은 몸짓이었다. 어른이 되기 싫어요. 찰스를 못 보는건 싫어. 에릭의 목소리가 찰스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온몸을 울리고 날개끝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시리게 울리는 날개를 뻗어 에릭을 품었다. 에릭은 흰 깃털 끝에 얼굴을 부볐다. 소년은 찰스의 날개가 자신을 감싸안아 껴안을 때를 제일 좋아했다.
“에릭, 기억해주렴. 아무리 어려운 때가 온다 해도 내가 널 위해 무언가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거야. 언제나.”
에릭이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 네가 날 보든 보지 못하든 널 사랑할거고.”
그러니 돌아가자. 감기 걸리겠다. 찰스가 웃으며 말했다. 에릭은 찰스의 품에서 벗어나 손을 내밀었다. 장갑 낀 고사리같은 손을 잡으며 찰스는 속삭였다. 넌 혼자가 아니야. 에릭도 찰스를 마주 올려보며 속삭였다. 알아요. 둘은 얼굴을 마주보고 행복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해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저런 에릭, 집중해야지.”
끔찍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에릭은 멍하니, 시야를 흐리는 흰 빛을 보며 찰스의 날개를 떠올렸다. 흰색. 부드러운 것. 심술궂게 잡아채면 놀라 파드득 거리던. 아래쪽에서 메스가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끼치는 손길이 에릭의 손을 두드렸다. 집중해, 에릭. 낮고 부드럽고, 일견 다정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에릭은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았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흐린 시야로 희끗한 머리의 남자가 장갑을 낀 손으로 메스를 들고 있었다. 온 방 안은 결벽적으로 희었고 침대 시트도, 남자의 옷도 그랬다. 흰색.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차가운 날붙이가 에릭의 살결에 닿았다. 본능적으로 움찔하고 떨린 몸뚱이는 구속구에 묶여 아주 조금 움직였을 뿐이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공포에 손끝이 바르르 떨려왔다. 에릭은 심호흡하며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좋은 것을 생각해야 해. 아름다운 것, 선한 것, 달콤한 것. 노력이 무색하게 차가운 메스는 느릿하고 우아하게 에릭의 배를 갈라왔다. 마취되지 않은 몸이 잘리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에릭은 고통과 공포가 섞인 소리를 내질렀다. 이미 너무 많이 울어서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쉬어빠진 목소리가 새된 소리를 질렀을 뿐이다. 찰스, 찰스? 내 천사 찰스. 여기 있어요? 내 말 들려요? 찰스!!!
대답은 없었다. 다만,
“에릭. 여기엔 우리밖에 없어. 그러니 좀 조용히 하는 게 좋겠구나. 단 둘만의 시간은 되도록 즐겁게 보내야지, 그렇지?”
절망적인 현실만이 그곳에 있었다.
인간들은 종종 착각한다.
그들의 상상 속의 천사는 전달자(Messenger)의 역할을 띄고 있다. 그들은 천사가 인간의 삶에 깊숙이 관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천사들이 꿈과 열망과 감사가 담긴 기도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려 신에게로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한다. 50% 이상의 인구가 천사의 존재를 믿으며 천사가 신의 충실한 일꾼이며 전사이리라 생각하지만 오, 글쎄. 안타깝지만 모두 틀렸다. 단 한 가지만 빼고는. 천사들은 메시지를 전한다. 찰스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속삭이는 소리들, 좁고 슬픈 부지를 울리는 속삭이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1944년. 세상은 잔혹하고 사악한 전쟁으로 슬픔 속에 침몰해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수용소에서, 전쟁터에서, 폐허에서 죽어갔다. 찰스는 귓가에 들리는 삶을 열망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들을 위로 하려했지만 죽음의 절망 앞에 그 위로가 전해지지 않음을 슬퍼했다. 자살을 결심한 이들의 마음속에 그 어떠한 따스함도 닿지 않는 것은 2천 년간 겪어왔다. 싸움과 살인에 기쁨을 느끼는 이들의 차갑게 굳은 심장에 속삭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도 이미 그만큼 느껴왔다. 그리고, 실질적인 공포 앞에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천사들의 속삭임은 겨울날의 꽃향기처럼 흩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의 위로는 아무도 듣지 못하기에 무의미한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날개를 펴고 죽음의 직전까지 사람들을 끌어안는 수밖에는 없었다. 아마 그들은 그마저도 느끼지 못 할 테지만.
인간들은 천사보다 세상을 더 믿는다. 매일 새로운 것들에 포위되어, 더 소리 지르고, 더 천박해지고, 더 간섭하면서 감각이 무뎌져만 간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지를 들을 수 없다. 그들의 심장은 더 단단해 지고, 그들의 귀는 막혀 있고, 그들의 눈은 닫혀있다. 그래서 그들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다. 메시지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공기 중에 흩어졌다.
하지만 제발 들어줘.
찰스는 지난 수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클라우스 슈미트의 귓가에 절박하게 속삭였다. 그 애를 괴롭히지 말아. 그만둬. 하지 마. 그 애에게 상처 주지 마. 그 애의 피부를 가르지 마! 오, 제발. 너의 마음 밑바닥에도 선함이 있음을 난 느낄 수 있는데!
그리고 마침내, 메스가 에릭의 피부에서 떨어지고 상처가 꿰매어져 뜨거운 피가 멈추었을 때, 찰스는 차갑게 식은 실험실 바닥에서 웅크려 비명을 지르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에릭의 작은 손을 꽉 쥐고 있던 손으로 고통에 차 헐떡이는 소년을 쓰다듬었다. 날개깃이 에릭의 숨결에 파르르하게 떨렸다. 그는 그의 가여운 소년에게 오직 단 한마디만을 속삭일 수밖에 없었다. 다 괜찮을거야. 다 괜찮을 거야 에릭.
시작은 공기처럼 다가왔다. 어느 순간, 어느 평범한 날의 아침이었다. 에릭이 눈을 뜨고, 찰스가 웃으며 인사한 아침,그는 에릭이 자신을 못 보게 되었음을 알았다. 에릭은 바로 코 앞에 있는 찰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몸을 굽히고 에릭과 눈을 맞추던 찰스는 에릭의 눈을 잠시 마주 보다 눈꺼풀에 가볍게 키스했다. 굿모닝, 에릭. 에릭의 눈은 점점 반들거렸다. 막힌 창틀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 소년의 눈가가 희게 비쳤다. 소년은 입술을 깨물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내 곁에 있죠?
“오, 물론이지.”
찰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날개깃으로 에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뺨을 스치게 하고 장난스레 작은 코 끝을 문질렀다. 여느 아침과도 같은 장난이었다. 그 상냥하고 애정이 담긴 날갯짓에 에릭의 눈꼬리에 걸려있던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에릭은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질렀다. 저런, 그렇게 세게 문지르면 안 되는데.찰스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 소년의 물에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굿모닝 찰스.”
…오.
사랑스러운, 나의 꼬마 에릭. 울면서도 잊지 않는 아침인사에 찰스는 작게 웃었다. 어른이 되는 걸 겁내지 말아야 할 텐데. 찰스의 시선 아래서 어린 에릭이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얼굴을 문질러 닦고 훌쩍이며 잠자리를 정리하고, 한동안 그대로 서서 펜던트만 만지작거리는 소년을 보며 찰스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딱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몇 천 년을 쓸쓸히 살아온 찰스에게 에릭은 빛나는 선물이었고 반짝이는 보석이었다. 지난 몇 개월동안 에릭이 찰스에게 주었던 기쁨은 그가 지구 위를 떠돌며 느꼈던 어느 기쁨보다도 컸다. 조금이나마 그 시간이 길기를 바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완벽한 신의 섭리다. 계절이 바뀌듯, 아이는 영원히 아이일 수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순수하나, 영향력을 끼치지는 못한다. 마치 천사처럼.
그래서 찰스는 에릭이 어른이 되었음을 자축했다. 다만 힘들고 어두운 시기에 소년을 위로할 수 없음에는 슬퍼했다. 에릭은 찰스가 없음을(보이지 않음을) 슬퍼했지만 그럭저럭 적응해나갔다. 다행히도 소년은 여전히 찰스가 곁에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찰스의 날개깃은 아직 소년의 뺨에 맞닿아 있었다. 찰스는 그것을 에릭이 남겨둔 일종의 끈 같은 것이라 여겼다. 헨젤과 그레텔이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조약돌을 던져두었던 것처럼, 에릭도 흔적을 남겨둔 건 아닐까.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위해. 찰스는 그 얼토당토않은 생각에 웃었지만 그래도 기뻐하며 기꺼이 에릭에게 날개를 내주었다. 내가 여기 있단다. 그건 일종의 신호였다. 에릭은 그것에 만족했다. 찰스도 만족했다.
그들은 등을 맞대고 서로 위로했다.
독일이 전쟁을 선포한 후, 에릭의 가족은 적어도 1944년 전까지는 무사했다. 별을 달고, 숨겨진 좁은 다락방에서 숨어 살아야하고 예전만큼 배부르게 먹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살아있었다. 친절한 이웃들은 바깥세상에 대한 소식을 알려주며 식량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그들의 선량한 이웃을 진심으로 걱정했고 바깥 도시에서 일어나는 비 인륜적인 이야기들을 두려워했다. 전쟁과 학대는 별개다. 마을주민은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했지만 자국 내에서 행해지는 유대인들에 대한 잔인한 처사는 이해하지 못했다. 정부가 말하는 ‘부유한 유대인’에 대한 올바른 행위에 대한 체감도 높지 않았다. 그들의 마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전혀 부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량했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갔다. 모두 조용하고 선한 사람들이었다. 우성학적인 측면에서 아리아인의 우월성과 유대인의 천박함과 더러움에 대해 떠들어대도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작고 조용한 마을의 사람들은 그들과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이웃들이 왜 천박하고 더러운지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더더욱 행운이었던 것은 아주 작은 마을인지라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늦어진 것에 있었다. 유대인 수용소에 대해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 거의 진실에 가까워 질 때 즈음, 마을에도 국가가 원하는 엄격함이 완벽히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그들의 이웃이 끌려가게 되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고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했다. 체제가 그들을 몰아가도,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은 오랜 이웃을 돕게 만들었다. 랜셔 가는 그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물론 희생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총성과, 고함, 도망가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에 소년은 귀를 막았다. 뇌리를 깊숙이 파고드는 잔혹함이었다. 아무리 외면하려 노력해도, 에릭은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결국에는 모두 눈치 챌 수 있었다. 겁에 질려 숨죽여 우는 에릭을 위로하는 것은 따스한 어머니의 품과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날개깃이었다. 비록 보이지 않았지만 찰스의 그것은 길게 뻗어져 에릭을 감싸 안았다. 에릭은 그 느낌에 매 순간순간 감사하며 목에 걸린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찰스는 닿지 않는 손과 온몸으로 소년을 껴안았다.
소년은 시대와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자라나 키가 훌쩍 크고, 손가락이 길어지고 발이 커졌다. 젖살이 빠지고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얼굴 모양새에 찰스는 에릭을 곁에서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넌 어떻게 자라날까? 네가 다 자라기 전에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그는 장난스레 에릭의 뺨을 날개의 끝으로 간질였고 에릭은 간지러움을 느낀 건지 뺨을 손으로 부볐다. 찰스는 그 모습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진주는 아직 진흙에 빠지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는 에릭과 맞닿을 수 있었다. 난 아직 여기 있어.
그들은 그렇게 몇 해를 났다. 이따금, 에릭은 벽에 타다 남은 숯으로 찰스를 그렸는데, 찰스는 그것을 보고 조용히 웃으며 에릭의 머리를 날개깃으로 쓰다듬었다. 에릭은 그것을 좋아했다. 소년이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의 미풍이었을 뿐이니. 에릭이 그리는 찰스는 에릭이 커갈수록 점차 그 형태가 단순해지고 뭉개져 갔지만 그 눈매와 날개만은 여전했다. 이따금 에릭은 찰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소리 내어 속삭이는 목소리도 성장과 함께 점차 낮아져갔다. 찰스는 아이의 목소리에 언제나 대답했다. 에릭은 대답을 들을 수 없었고, 찰스는 질문을 할 수 없었지만 그들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에릭은 어둠 속에서 찰스로 인해 위로받았다. 무섭고, 떨리고,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잔뜩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찰스가 있었다. 그의 천사는 언제나 그와 함께 하고 있었고, 예전처럼 말을 걸거나 서로 껴안거나 장난칠 수는 없었지만 찰스의 따스하고 하얗던 날개가 퍼덕이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에릭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비가 내리던 1944년.
마을에 숨어있던 마지막 유대인들이 모두 발각되어 끌려나왔다. 에릭은 그들을 숨겨주었던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까지 생각하기에 불시에 상처 입은 소년의 마음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이 깨닫게 된 현실은 지독하고 차가웠다. 너무 차가워서 차갑다는 것을 못 느낄 정도로 창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이제 막 어린아이의 태를 벗어던지기 시작한 에릭에게 갑자기 닥쳐온 현실감각은 너무 버거웠다. 해묵은 악의가 그들을 향해 진득하게 뻗어지고 있었다.
회색 하늘에 비가 추적이며 내리고 기차에 짐짝처럼 실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랜셔 가족은 차마 그들의 지옥이 그곳에서 펼쳐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찰스도, 지난 세월을 통틀어(그리고 앞으로를 통틀어) 무섭도록 끔찍한 1년이 그와 그의 소년을 기다리고 있음을 꿈에도 알 수 없었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도 유대인들이 검은 화물 기차에서 끌려나왔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듯한 얼굴들, 겁에 질리고, 배고픔에 지친 이들은 군인들의 거친 말씨와 발길질, 더러운 것을 만지는 듯한 손짓에 주춤주춤 수용소 안으로 들어섰다. 어린 에릭과 찰스의 시선에 비를 맞으며 일하는 유대인들이 보였다. 공기가 거칠었다. 천사들이 슬퍼하며 사람들의 등 뒤에 서 있거나 벽에 기대어 있었다. 찰스가 그들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들은 슬퍼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힘겹게 일하는 사람들의 등 뒤에서 그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위로했다. 하지만 그들의 메시지는 언제나 독백일 뿐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찰스는 조심히 에릭의 뒤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걸었다. 부모의 곁에 바싹 붙어 걷는 에릭은 크게 겁에 질려 있었다. 듣기만 하던 것들을 직접 겪게 된다는 공포는 소년을 주눅 들게 했다. 찰스는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얘야, 겁먹지 마. 내가 네 곁에 있잖니. 넌 혼자가 아니야. 그 때 갑자기 소년이 부모와 떨어져나갔다. 아이를 붙잡아 내친 군인의 손은 차갑고 딱딱했다. 겁먹은 에릭은 어찌할 줄을 모르며 어머니를 불렀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아들을 향해 소리쳤다. 찰스는 에릭의 잔뜩 굳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따라가 에릭. 어서. 적어도, 지옥 속에서 부모와 함께 있는 편이 아이에게는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에릭이 결심하여 군인들을 밀어젖히고 뛰쳐나갈 때 비에 젖어 식은 철문이 굳게 닫혔다. 에릭의 부모는 그 문 너머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오 맙소사. 에릭은 울부짖으며 부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달려든 군인들은 아이를 문에서 떼어내어 끌어냈다. 그들에게 붙잡혀 우는 아이의 손 끝은 부모를 향해 있었다. 무서움, 공포, 걱정…. 그 모든 것이 뒤엉켜 아이의 손끝에서 내뻗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이 왔다.
에릭 랜셔의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은 그 순간. 부모를 향해 내 뻗은 손이 바꿔놓은 지침.
찰스는 솔직히, 에릭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난 수천 년의 세월을 절대 잊지 않았지만 그 기억만은 묻어두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절대 그것을 묻어버리지도, 잊어버리지도, 지워버리지도 못했다. 그저 그 모든 일들을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히 기억했다. 모든 것을, 메스의 놀림 하나하나, 소년의 비명 하나하나까지도. 그의 어린 소년은 뼈가 발라지고 근육이 끊어지고 두개골이 쪼개어졌었다. 흰 바닥에 쏟아지는 피의 색은 시리게 선명했다. 찰스는 무채색의 세상에 흘러내리는 피가 어쩐지 너무 붉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년은 증오를 배웠다. 분노를 배우고 미움, 공포, 어둠, 아픔을 배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것은 찰스 그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이를 껴안고 위로하고 속삭이고 쓰다듬고 날개로 보듬는 것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이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대신 고통 받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찰스는 인간이 될 수 있길 바랐다. 에릭을 이 지옥에서 꺼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대신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아니면 에릭의 작은 손을 꼭 잡아주는 것만이라도 할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에서, 그가 살아온 세월도 날개도 속삭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찰스는, 비통했다.
1940년 여름, 어느 날 에릭은 더 이상 찰스를 볼 수 없었다. 그를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맑은 날의 소낙비처럼 갑작스레 찾아왔다. 어떤 전조도, 예고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도 무사히 집에서 일어날 수 있음에 감사하고, 햇살이 비좁은 창문 틈으로 실낱같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찰스의 굿모닝 키스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때 즈음, 소년은 제 곁에 찰스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동안 멍하니 누워 천장만 올려다보던 소년은 차마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입술만 깨물며 속으로 속삭였다.
아직 내 곁에 있죠?
대답은 없었다. 다만, 아주 조심스럽고 느릿한, 하지만 선명히 느껴지는 날개의 퍼덕임을 알 수 있음에 감사했다. 언제나의 아침처럼 코끝을 스치는 미풍이 있었다. 에릭은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문질러 닦아냈다.
굿모닝 찰스.
자, 에릭 울지 말렴, 지금부터가 제일 재미있는 순간이야. 그렇지?
에릭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꿈에서 깨어났다. 눈만 커다랗게 뜨고 숨을 몰아쉬던 에릭은 얇은 이불을 꽉 쥐고는 주위를 확인했다. 그의 작은 방이었다. 차가운 수술대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한 소년은 몸을 일으켜 둥글게 말고 다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일주일 전에 봉합된 등의 상처가 욱신거리고, 깊은 잠을 자지 못해 방금 깼음에도 피곤했다. 높다란 곳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빗줄기가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창틀에 튕겨 떨어지는 빗물을 받으며 에릭은 속삭였다. 굿모닝 찰스. 그에 화답하듯 가벼운 날갯짓이 에릭의 뺨을 스쳤다. 에릭은 창백한 양 볼을 붉히며 옅게 웃었다. 아직 있어서 다행이에요. 소년은 몸을 한차례 더 둥글게 말았고 소중히 지켜온 펜던트를 손안에서 굴리며 눈을 감았다.
인간은 시련으로 완성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꾹 참고 견뎌낸다면 네게 언젠가 그 보상이 올 거야.
언젠가 아버지가 했던 말이다. 하지만 에릭은, 이 뒤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과연 이 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작은 방을 벗어나, 끔찍한 수술대 위와 그 남자의 손에서 도망쳐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어머니는 에릭이 동전을 움직이지 못했기에 돌아가셨다. 그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얼마 전 가스실에서 숨졌다. 에릭은 투명한 방 안에 갇힌 아버지가 점차 차오르는 가스에 질식해 죽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았다. 슈미트 박사는 에릭이 눈을 가리거나 감지 못하게 했고 소년은 그것을 모두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에릭은 울며 마음 속으로 속삭였다. 찰스, 말해줘요. 아버지는 천국에 갈까요? 더 좋은 곳으로 가실까요? 여느 때처럼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공기 중에 느껴지는 날개가 아주 조심히 에릭의 머리를 쓸고, 들썩이는 등을 도닥였다. 소년은 그것을 위안 삼았다. 이 모든 끔찍함에서 벗어나 아무런 고통도 없는 곳으로 가시길. 부디,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하시길. 그게 그들의 보상이자 완성일 것이다.
소년은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평범한 아이였다면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했겠지만 에릭은 조금 달랐다. 어린 소년은 증오와 분노와 두려움과 공포를 작은 몸 안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것 또한 알았다. 에릭의 곁에는 찰스가 있었다. 그래서 에릭은 작은 머리를 짜내어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했다. 살아남아서 어떤 식으로 나를 완성해야 할까. 그것은 소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후의 발버둥이었다. 찰스가 곁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은 골방에 갇혀, 때가 되면 끌려나와 실험을 빙자한 온갖 고문을 당하는 하루살이 인생 속에서도 에릭은 찰스를 통해 힘을 낼 수 있었다.
소년은 우발적인 첫 살인 후 그 비릿한 현장에 남아 동전을 손에 쥐고 울 때를 기억했다. 그 싸늘함. 외로움. 슬픔. 차마 쓰러진 어머니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를 보면, 이 방안에서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움츠러들어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던 에릭은 조금 전에 저지른 일을 서서히 인식하고 공포에 휩싸였다. 살인. 얼음물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에릭은 목에 걸린 펜던트를 와락 움켜쥐었다. 난 혼자가 될 거야. 소년은 공포에 떨며 필사적으로 찰스를 불렀다. 찰스, 찰스, 찰스, 찰스!!! 거의 비명을 지르며 수십 번을 불러 댔을 때야 에릭은 날개가 계속해서 그를 감싸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에릭은 그것을 거친 숨결에 부딪치는 깃털의 떨림으로 알아챘다. 천사는, 곁에 있었다. 이 끔찍한 현실에서 소년을 구해내지도 어머니를 구해내지도 못했지만, 사람을 죽인 죄를 진 소년의 곁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에릭은 유리벽에 등을 기대고 미끄러져 울며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요. 미안해요. 떠나지 말아요. 잘못했어요. 곁에 있어줘요. 혼자 두지 말아요.
에릭은 추락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남을 미워하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려 하고, 좋은 것을 생각하려 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빛나고 반짝이는 한 가지를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이진 않지만 언제나 곁에 있는 천사만이 에릭이 가진 전부였다.
소년은 자신과 천사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지옥 속에서.
깜박 잠이 들었던 에릭은 소란스러움에 눈을 떴다. 비가 내리는 창에서 요란스럽고 다급한 고함들이 들려왔다. 무거운 것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렸다. 박사가 돌아온 걸까? 에릭은 이불을 와락 움켜쥐었다. 슈미트 박사는 일주일 전의 실험을 끝으로 에릭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지나가던 군인들의 말로는 일이 있어 어디론가 급히 떠났다고 한다. 무슨 일 인진 모르겠으나, 에릭에게는 꿀 같은 휴식이었다. 하지만 그 휴식도 이제 끝이 난 것 같았다.
“나와!”
날카로운 독일어가 에릭의 방 밖에서 소리 질렀다. 에릭은 겁에 질려 침대 맡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끼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독일 장교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그를 직시하며 다가왔다. 매 같은 눈매의 장교는 에릭을 머리 위부터 발끝까지 훑더니 씹어뱉듯 말했다.
“독일이 졌다, 유대인. 우린 이 곳에서 철수할 거다.”
에릭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장교를 빤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날갯짓이 여느 때와 다르게 빠르게 스치는 것이 느껴졌으나 소년은 그것을 미처 신경쓰지 못했다. 자유야. 이제 돌아갈 수 있어. 그 커다란 진실이 에릭의 마음을 부풀게 했다. 장교는 기쁜 기색을 미처 감추지 못하는 에릭을 내려다보다가 발로 걷어찼다.
“악!”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발길질이 재차 날아왔다. 에릭은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보호했다. 거칠고 단단한 군홧발이 에릭의 마르고 앙상한 몸을 가차 없이 걷어차고 밟아댔다. 등의 상처가 터진 것 같았다. 머리에서도 피가 흘러 눈을 가리고, 밟힌 손가락에서는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귓가에선 끊임없이 날개가 퍼덕였다. 에릭도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았다.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머리 위로 장교의 서릿발 같으면서도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슈미트 놈은 이럴 줄 알고 미리 도망간 게 틀림없어. 그 놈이 남기고 간 건 네 놈밖에 없더군. 여기서 나가기 전에 네 놈만은 죽이고 나가야겠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릭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피로 흐린 시야 사이로 올려다 본 장교는 에릭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있었다. 더러운 놈. 장교는 그 말을 끝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아니, 당기려 했다. 방아쇠는 누군가 걸어놓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장교가 당황한 사이 총은 한차례 부르르 떨리고 제멋대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든 그것을 제대로 잡아보려 했지만 그 시도도 곧 무의미해졌다.
퍽
둔탁한 파열음이 울렸다. 장교의 몸이 뒤로 서서히 쓰러졌다. 에릭은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총은 뒷부분이 터진 채 연기가 나고 있었다. 총알이 뒤로 튕겨 나와 장교의 머리를 관통한 흔적이었다. 그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결벽적으로 흰 바닥을 적시고 에릭의 손까지 번져왔다. 붉은 피는, 뜨거웠다. 에릭의 것과 다를 바 없이.
그리고 에릭은 누가 그렇게 했는지 알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귓가가 너무 조용했다. 바깥에서 나는 소리만이 에릭의 청각을 장악했다. 나머지는 소름끼치도록 고요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심장을 칼로 저미는 듯한 선뜻함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총알이 튕겨나가는 순간 한번 멈췄던 심장이 터질 것같이 뛰기 시작했다.
…찰스…?
“…찰스!”
제발, 이번 단 한번만…!
“여기 있죠? 여기, 내 곁에 있죠?”
대답은 없었다.
바깥에서는 장교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는 이곳에 지체할 수 없다. 에릭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열린 문으로 뛰어나와 달렸다.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치고 달리며 계단을 내려와 문을 열어 건물 바깥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아침나절에는 추적이며 내리던 비가 몸을 꿰뚫을 듯 사납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에릭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달렸다. 그와 그의 부모를 갈라놓았던 철문을 우그러트려 열어젖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이렇게 쉬운걸, 이렇게 단순한 것을! 뒤에서 총을 쏘아댔지만 에릭에게 이제 그 정도는 우스울 뿐이었다. 하지만 에릭은 웃지 않았다. 소년은 웃지 못했다. 바람이 모두 걷어간 듯, 언제나 느껴지던 날개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등 뒤가 희게 식었다. 그는 하얗게 질린 채로 한참을 빗속을 헤쳐 나갔다. 발은 분명히 땅을 내딛고 있음에도 비현실적으로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뺨 위로는 뜨거운 것이 마구 쏟아졌다. 에릭은 헐떡이며 더러운 회색 골목으로 숨어 들어갔고 한참을 더 들어가서야 멈췄다. 시궁창 물과 쓰레기가 에릭의 낡은 신발을 적셨다.
“…내 잘못이 아니야….”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쉬며 비를 맞던 에릭은 입을 틀어막았다. 빗물에 피가 씻겨 내려가며 차갑게 식는데, 속에서는 뜨거운 것이 울컥이며 올라왔다. 용광로에서 막 녹인 쇳물처럼 거칠고 뜨겁게, 온몸을 태워버릴 것 같았다. 그 뜨거움은 가슴에서 흘러넘쳐 뺨을 적셨다. 심장이 저며왔다. 뜨겁고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러웠다. 에릭은 벽을 타고 주저앉았다. 거친 돌벽을 타고 핏물이 흘렀다. 하지만 몸을 적시는 차가운 물도, 등의 상처의 고통도,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에릭은 한동안 흐느끼다가 어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내 잘못이 아니야. 알잖아. 알잖아요!!!”
떠나지 않는다고 했잖아….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소년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었다. 유대인인 것, 이 곳에 잡혀온 것 어머니가 죽었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 아버지가 가스실에서 죽는 것을 개처럼 끌려와 보았어야 했던 것, 증오스런 슈미트에게 오장육부와 머리 속까지 낱낱이 보인 것.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한 그 남자를 죽여 버린 것. 모두 에릭의 동의를 받지 않고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누구도 소년을 비난 할 수 없었다.
“…내 잘못이 아냐…….”
하지만, 소년은 죄책감에 몸부림쳤다. 어머니가 죽을 때 동전을 움직이지 못했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지 못하고, 아버지를 구해내지 못한 자신. 그리고, 자신을 위협한 남자를 끝내 죽여 버린 것까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소년은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진실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을 지켜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 그리고 결국에는 다시는 하지 않겠다던 실수를 반복한 자신이 여기 있었다.
에릭은 뿌연 눈을 비볐다. 손이 붉었다. 빗물에 덜 씻긴 손이 얼룩져 더러웠다. 에릭은 뺨을 닦다 말고 그 손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아.
소년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텅 비고, 의미 없는 탄성이었다.
더럽고 좁은, 냄새나는 골목에 그가 홀로 있었다. 그는 비명과 죽음, 가스와 어둠이 가득한 곳에서 도망쳐 나온 초라하고 더러운 소년이었다. 쏟아져 내리는 폭우 속에서 에릭은 그것을 깨달았다. 더럽고 무지한 소년, 심지어 손에 피를 묻힌 소년은 세상의 오점 같은 존재다. 비록 그가 과거에 그러지 않았더라도 이제는 그러했다. 그는 온몸이 해부되었다가도 다시 꿰매어질 때도 살아남고, 폭력에 굴하지 않으려 애쓰며 용서하려 했던 것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반복된 한 번의 핏자국이 그를 완벽하게 물들였고, 이제 에릭은 그것을 알았다. 가슴에 단 별도, 괴물 같은 능력도 그 자신을 그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다만, 온몸에 묻은 피와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 날갯짓의 미풍이 그를 설명했다. 더럽고, 더럽혀지고, 앞으로도 계속 더러울 에릭 랜셔. 마음 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았던 것이 차올라 내뱉는 숨결마다 공기 속에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에릭은 직감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지 이미 알아버렸다.
그는 복수할 것이다. 그를 이 시궁창에 쑤셔 박고 그에게 침을 뱉고 구둣발로 짓이기며 메스를 들이댄 이들에게. 그리고 그의 어머니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아버지를 가스로 질식사시킨 그 모든 죄목을 가진 이들에게도. 에릭은 싸늘했던 수술실과 자신을 괴물로 만든 남자도 결코 잊지 않았다. 그 남자는 그의 영원한 숙명이 될 것이다. 평화와, 안주 따위는 없는 에릭의 삶 최대의 목표가 될 터였다. 그리고 그들의 죄 몫은 그것 뿐 만이 아니었다. 에릭은 그것 또한 잊지 않았다. 혼자가 된 소년은 그것을 영원히 잊지 못했다.
에릭은 천천히, 더러운 골목에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땅바닥에 고인 빗물에 손을 닦았다. 마음 한 구석이 찢겨나간 듯 너덜거리고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잊어버리기로 했다. 이제는 살아남아야 했다. 혼자서, 아무에게도 도움 받지 않고 도움 받지 못하는 괴물인 채로. 그의 천사와 함께 했던 시절은 이미 아득했다. 소년의 신비롭고 마법 같던 겨울은 이제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연어처럼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에릭은 그것을 알았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그 날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순수성. 그리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나의…….
에릭이, 더 이상 아이가 아니게 되었을 때,
소년은 완전한 고독을 알게 되었다.
그는 혼자였다.
하지만 차마 ‘안녕’을 말하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은 그 나름의 비밀과 경이로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누가 그것들을 이야기로 엮을 수 있으며, 누가 그것을 해석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이 고요한 경이의 숲을 방황하며 빠져나왔다. 우리는 모두 한때 모든 감각이 마비된 행복감에 젖어 눈을 떴으며, 삶의 아름다운 현실이 우리의 영혼 위로 넘쳐흘렀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우리가 과연 누구였는지를 몰랐었다. 그 때에는 온 세계가 우리 것이었으며, 우리 자신은 온 세계에 속해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영원한 삶이었다-시작도 끝도 없는-정체와 고통도 없는. 우리의 마음속은 봄날 하늘처럼 맑았고 오랑캐꽃 향기처럼 신선했었다. 일요일 아침처럼 고요하고 성스러웠다.
그런데 무엇이 나타나 이처럼 신성한 어린이의 평온을 방해하는 것일까? 어찌하여 이 같은 무의식과 지순의 현존이 종식을 고할 수밖에 없는가? 무엇이 우리를 이처럼 완전하고 편재하는 행복감에서 몰아내어, 우리로 하여금 느닷없이 어두운 생의 한가운데 외롭게 홀로 서게 하는가?